♧ 어머니의 손 – 강규진
내가 어릴 적에는
젊어서 예쁜 어머니
추운 겨울이 되면
시린 내 손을 잡고
추위를 녹여주던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으로
북두칠성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노래할 줄 알았다
돌담 옆에 감나무가
지붕보다 더 크는 동안
나도 어른이 되고
어머니는 팔순이 넘으셨다
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지만
날이 갈수록 어머니의 손은
꽃잎마냥 시들어 야위어 간다
먼 하늘에 뜬 별은 변함없이
그때처럼 아름답게 빛나는데.
♧ 낡아가는 사랑 - 김종호
배암이 벗어놓은 허물에
겨울 햇살이 눈을 찌를 때
새벽이슬도 차마
마른 잎을 적시진 못했으리
함께 창밖을 바라보면서 너와 나
서로 다름도 참 싱그러웠는데
노래하던 새들은 겨울 숲을 떠나고
얼마쯤 사이를 두고 나무들은 서서
지음知音의 기억 속으로 젖어들고 있다
고집을 버린 페인트의 순한 눈빛과
벽을 끌어안은 푸름을 버린 담쟁이
세월의 너그러움에 너와 나
끄덕이면서 함께 낡아가는 사랑
난로의 온기에 무심히 손을 펴며
착한 눈빛을 내리고 묵묵히 있다
♧ 애월에 가면 7 – 김창화
흰머리 지금이나 어렸을 적에도 마을뒷산
고내봉에 오르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만년 세월에 애월을 지켜보며 키워온,
수평선 저쪽
청잣빛 얼굴의 큰 관탈과 작은 관탈이
장송들 사이로 오롯하게 다가오면,
장송 숲 어딘가에서 다문다문 들려오는
까투리 찾아 부르는 장끼의 짝사랑 노래
햇살 환한 숲 나뭇가지에 앉아 쉬는
산새들 노래처럼
쪽빛 바다 해녀들 숨비소리
남풍에 흐르는 푸른 하늘 흰 구름 마냥
해변에 부서지는 쪽빛바다의 물너울들.
살면서… 호흡이 가쁘도록 살아가면서
등 너머로 찬바람이 밀어닥칠 때도
애월에 가면
마음속 잃어버린 서정을 찾을 수 있다네.
♧ 할머니의 황토방 – 김충림
두메산골 옹기종기 초가마을
세 칸 남짓 안팎거리*와 쇠막사리*
밖거리에 있던 할머니의 방은
붉은 진흙을 이겨 바를 황토찜질방
겨울이 보이는 늦가을부터
골체* 들고 올레길에 나가
말똥 소똥 주워 말려 추운 날은 ᄀᆞ시락 섞어
굴묵을 지덧지*
금이 간 방바닥 사이로
매캐한 연기 모락모락 피어올라
방안 가득 흘러도
방바닥 아랫목은 지질 듯 따스하여
할머니의 언 몸 녹여주었느니
벽에는 메주덩어리 주렁주렁
파랗게 물들어 가고
방 한 구석에선 오메기* 술항아리가
구수한 술 향을 풍기며
부글부글 익어가고 있었네
칠십여 년이나 지나온 세월 저편
할머니 방은 흙 내음 흐르던
따뜻하고 풍요로움이 가득한
낙원이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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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거리 : 안채와 바깥채
*쇠막사리 : 외양간
*골체 : 삼태기
*ᄀᆞ시락 : 까끄라기
*굴묵을 짓다 : (제주식)온돌을 때다.
*오메기술 : 차좁살로 빚은 술
♧ 밤비는 오는데 – 문경훈
지난밤 내린 비에 기온은 쌀쌀하고
오래전 다친 상처 다시금 쓰려온다
덧없는 세월은 대나무 피리 되어
추억의 숨소리로 애간장 태우네.
단풍이 떨어지면 낙엽이 되는데
내 마음 기댈 곳을 찾고 있노라면
밤비는 그대의 발자국만 적셔주고
밤비는 오는데 추억만 흘러 젖네.
♧ 섬 – 김태호
따돌림 당한 게 아니다
스스로 떨어져 나왔을 뿐이다
사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다
만남의 번뇌를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반갑게 악수를 하고 돌아서는
너와 나의 어깨는
언제나 쓸쓸하지만 우리는
그 모습을 바쁜 걸음 속에 숨기려 한다
정겨운 말잔치
웃음의 불꽃놀이
화려한 포옹에
눈과 귀를 빼앗겨
그렇게 한바탕 넋을 잃고 나면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오는 공허
남들은 나를
외톨이라 말하겠지
그러나 나는 스스로 찾아드는,
물감처럼 스며드는
나만의 섬에서 자유로운 새가 된다
* 애월문학회 간 『涯月文學』 2021 제12호에서
* 사진 : 제주 풍경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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