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경훈 시집 '수선화 밭에서'의 시(4)

김창집 2021. 11. 23. 00:51

 

뚝배기 그릇처럼

 

제 몸 온전히 덥혀

남 오래 따뜻하게 하고

 

제 속에 담겼으되

제 것 아닌 양 죄다 퍼주고

 

제 목숨 다하는 날까지

비워내서 식어가는

 

문득

부처님 탁발이요

예수님 성배다

 

 

권위에 대하여

 

내 안에서부터 모든 권위를 버리고 싶다고

현철이와 경희에게 넌지시 얘기했더니

 

형은 원래 권위가 없는데?”

없는 권위 주워다 버리려면 그게 더 힘들겠네!”

 

권위라는 것이 아무래도 내게는

기를 쓰고 밀어도 다시 돋는 때 같은 것인가 보다

 

 

뇌 세척 바이러스

 

만약에

사람 뇌에 침투하여

그 뇌를 박박 씻어내는

바이러스 있다면

나 그에게 감염되어

인간의 머릿속

온갖 더러운 균 잡아먹고

순화 시키리 재빠르게

전염시켜

세상 좀 씻어 내리고

비온 뒤 가라앉는 먼지처럼

나 맑은 아침 해에

장렬히 전사하리

 

 

고해苦海

 

호젓한 길섶에 맑은, 영혼 하나 두고 가니,

 

문득 이 길 가는 그대, 얼핏 눈에 들거든,

 

이리도 애달픈 가슴, 살아 떠나지 않음을,

 

 

나의 절명사絶命辭

 

나의 죽음은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가

만약 내 나이 육십오 세가 되도록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벽이 있거든 폭탄을 안고 돌진하리라

나 자신 산산이 부서져서 그 벽에 구멍을 내리라

그러니 봉분이나 비석 따위 세우지 말라

날르 기억하고 싶으면 오직 그 벽을 마저 허물라

나의 절명사는 그렇게 마무리 되어야 하리라

 

 

낮아진다는 것

 

내가 그것밖에 안 되니

그것밖에 안 되게 살자고

 

거듭 다짐하면서도

사람 욕심이라는 게

 

평생 그것밖에 안 된다고

이제 그것밖을 생각하는가

 

이미 수준을 넘은 사람은

절대로 낮아질 수 없다

 

이미 바닥을 친 사람도

절대로 더 낮아질 수 없다

 

내가 그것 밖에 안 되니

더 낮게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것 밖에 안 되는

그것 밖의 나의 삶이다

 

 

                            * 김경훈 수선화 밭에서(도서출판 각 시선 046, 2021)에서

                                      * 사진 : 양하 열매(쳇망오름, 2021. 11.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