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뚝배기 그릇처럼
제 몸 온전히 덥혀
남 오래 따뜻하게 하고
제 속에 담겼으되
제 것 아닌 양 죄다 퍼주고
제 목숨 다하는 날까지
비워내서 식어가는
문득
부처님 탁발이요
예수님 성배다
♧ 권위에 대하여
내 안에서부터 모든 권위를 버리고 싶다고
현철이와 경희에게 넌지시 얘기했더니
“형은 원래 권위가 없는데?”
“없는 권위 주워다 버리려면 그게 더 힘들겠네!”
권위라는 것이 아무래도 내게는
기를 쓰고 밀어도 다시 돋는 때 같은 것인가 보다
♧ 뇌 세척 바이러스
만약에
사람 뇌에 침투하여
그 뇌를 박박 씻어내는
바이러스 있다면
나 그에게 감염되어
인간의 머릿속
온갖 더러운 균 잡아먹고
순화 시키리 재빠르게
전염시켜
세상 좀 씻어 내리고
비온 뒤 가라앉는 먼지처럼
나 맑은 아침 해에
장렬히 전사하리
♧ 고해苦海
호젓한 길섶에 맑은, 영혼 하나 두고 가니,
문득 이 길 가는 그대, 얼핏 눈에 들거든,
이리도 애달픈 가슴, 살아 떠나지 않음을,
♧ 나의 절명사絶命辭
나의 죽음은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가
만약 내 나이 육십오 세가 되도록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벽이 있거든 폭탄을 안고 돌진하리라
나 자신 산산이 부서져서 그 벽에 구멍을 내리라
그러니 봉분이나 비석 따위 세우지 말라
날르 기억하고 싶으면 오직 그 벽을 마저 허물라
나의 절명사는 그렇게 마무리 되어야 하리라
♧ 낮아진다는 것
내가 그것밖에 안 되니
그것밖에 안 되게 살자고
거듭 다짐하면서도
사람 욕심이라는 게
평생 그것밖에 안 된다고
이제 그것밖을 생각하는가
이미 수준을 넘은 사람은
절대로 낮아질 수 없다
이미 바닥을 친 사람도
절대로 더 낮아질 수 없다
내가 그것 밖에 안 되니
더 낮게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것 밖에 안 되는
그것 밖의 나의 삶이다
* 김경훈 『수선화 밭에서』 (도서출판 각 시선 046, 2021)에서
* 사진 : 양하 열매(쳇망오름, 2021.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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