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레바스
거대한 빙하가 내게로 넘어온다
사랑한다, 안 한다
당신과 나 좁힐 수 없는 간극
사랑한다, 안 한다
물결자국이 날카롭게 지나가는 순간
미끄러지며 날개 돋듯 눈물겹게 솟아오르는 찰나,
사랑한다, 안 한다
빗금을 치며 투신하는 눈부신 잔설의 결정들
선 긋기를 한다
슬픔을 가르듯
사랑한다, 안 한다
얼음조각에 금이 간다
♧ 기억의 심야식당
어둠이 던져지면 골목은 아가리를 벌린다
나는 개랑 놀고 있는데 구름은 창문에 식물을 키운다
비는 언제 그치는지 전화는 언제 오는지
골목의 입맛에 길든 시간은 긴 혀를 도려내고
검은 달빛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간다
장마 전선 북상은 처음이라고 긴 고백을 한다
등을 보이지 마세요
입술을 깨물 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머리칼을 자르고 삶을 오려 창틈에 대롱 매다는 그늘 같은 표정들
어떤 슬픔은 몸부림처럼 딱딱 아귀가 맞는다
국밥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사이
한 사내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
♧ 저녁의 말
바람이 흐릿하게 부는 저녁
입을 열면 쏟아지는 은백색 비늘들
몸살 바람에 기우뚱하더니
그물에 뛰어드는 날 선 입질
쓸쓸한 가시가 박힌 세 치 혀
핏물이 번지는 말문을 토막 내버리고
주름진 양파와 잠잠하던 파도
흥건히 맺히는 물결의 무늬들
하얗게 염분을 토해내는 날들
다물어지지 않는 아가미를
휙--
낚아채는 바늘
♧ 청동거울의 노래
거울 속으로 물고기들이 끌려간다 밤마다
몸을 바꾸는 그림자로 숨어 우는 바깥
심장이 멈춘 자리 귀한 꽃 꺾어 내려놓으니
물색의 잠은 무척 달다
들어왔다 사라지는 망각은 죽은 기억의 거품
이대로 숨어 살까나 철쭉꽃 숨죽여 칼 위에서 춤을 춘다
물살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쓸쓸한 이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버려진 꽃잎은 안중에 두지 말고 거울이 남몰래 야위어갔다는 풍문이 떠돌아도
부끄러운 사랑이 늑골로 들어앉는다
한때 몸에 비늘이 돋아나는,
거울을 꿈꾸는 물고기였으니
사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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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가 신라 성뎍왕 때 노옹에 의하여 불린 4구체 향가.
♧ 세한도의 감정
한 점, 먹물이 튀어 물마루 건너편 시차가 생긴다
그믐이 시커멓게 먹빛 울음 우는 동안
잎이 무성한 전생을 견디느라 기울어진 눈썹
껍질을 벗겨 바늘잎에 꿴 잣, 여남은 개씩 묶어 높이 쌓은 열두 달 문양
예리하게 속내를 뜯긴 달그림자, 상현과 하현은 당신의 이름을 새기고
흰빛에 검은 획으로 독獨을 베껴 쓴 피붙이들
서릿발로 먹을 갈아 적막하게 몸만 남은 당신
서러운 붓 한 자루, 가시울타리 허공을 읽는다
저녁이 되면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한 번을 피하지 못한 하늘의 시샘, 익숙하게 한기가 몸을 숨기는
오늘은 뛰어내릴 수 없는 유배지
행과 연이 사라지는 고독사, 아무도 문장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너울너울 죽어서 백년을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
세한도 속으로 쓸쓸히 걸어 들어간다
*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 (리토피아 포에지 121, 2021)에서
* 사진 : 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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