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의 시(3)

김창집 2021. 11. 29. 00:03

크레바스

 

거대한 빙하가 내게로 넘어온다

사랑한다, 안 한다

 

당신과 나 좁힐 수 없는 간극

 

사랑한다, 안 한다

 

물결자국이 날카롭게 지나가는 순간

 

미끄러지며 날개 돋듯 눈물겹게 솟아오르는 찰나,

 

사랑한다, 안 한다

 

빗금을 치며 투신하는 눈부신 잔설의 결정들

 

선 긋기를 한다

슬픔을 가르듯

 

사랑한다, 안 한다

 

얼음조각에 금이 간다

 

기억의 심야식당

 

어둠이 던져지면 골목은 아가리를 벌린다

 

나는 개랑 놀고 있는데 구름은 창문에 식물을 키운다

 

비는 언제 그치는지 전화는 언제 오는지

 

골목의 입맛에 길든 시간은 긴 혀를 도려내고

 

검은 달빛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간다

 

장마 전선 북상은 처음이라고 긴 고백을 한다

 

등을 보이지 마세요

 

입술을 깨물 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머리칼을 자르고 삶을 오려 창틈에 대롱 매다는 그늘 같은 표정들

 

어떤 슬픔은 몸부림처럼 딱딱 아귀가 맞는다

 

국밥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사이

 

한 사내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다

 

저녁의 말

 

바람이 흐릿하게 부는 저녁

입을 열면 쏟아지는 은백색 비늘들

몸살 바람에 기우뚱하더니

그물에 뛰어드는 날 선 입질

쓸쓸한 가시가 박힌 세 치 혀

핏물이 번지는 말문을 토막 내버리고

주름진 양파와 잠잠하던 파도

흥건히 맺히는 물결의 무늬들

하얗게 염분을 토해내는 날들

다물어지지 않는 아가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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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아채는 바늘

 

청동거울의 노래

 

거울 속으로 물고기들이 끌려간다 밤마다

 

몸을 바꾸는 그림자로 숨어 우는 바깥

 

심장이 멈춘 자리 귀한 꽃 꺾어 내려놓으니

 

물색의 잠은 무척 달다

 

들어왔다 사라지는 망각은 죽은 기억의 거품

 

이대로 숨어 살까나 철쭉꽃 숨죽여 칼 위에서 춤을 춘다

 

물살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쓸쓸한 이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버려진 꽃잎은 안중에 두지 말고 거울이 남몰래 야위어갔다는 풍문이 떠돌아도

 

부끄러운 사랑이 늑골로 들어앉는다

 

한때 몸에 비늘이 돋아나는,

 

거울을 꿈꾸는 물고기였으니

 

사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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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가 신라 성뎍왕 때 노옹에 의하여 불린 4구체 향가.

 

세한도의 감정

 

한 점, 먹물이 튀어 물마루 건너편 시차가 생긴다

 

그믐이 시커멓게 먹빛 울음 우는 동안

 

잎이 무성한 전생을 견디느라 기울어진 눈썹

 

껍질을 벗겨 바늘잎에 꿴 잣, 여남은 개씩 묶어 높이 쌓은 열두 달 문양

 

예리하게 속내를 뜯긴 달그림자, 상현과 하현은 당신의 이름을 새기고

 

흰빛에 검은 획으로 독을 베껴 쓴 피붙이들

 

서릿발로 먹을 갈아 적막하게 몸만 남은 당신

 

서러운 붓 한 자루, 가시울타리 허공을 읽는다

 

저녁이 되면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한 번을 피하지 못한 하늘의 시샘, 익숙하게 한기가 몸을 숨기는

 

오늘은 뛰어내릴 수 없는 유배지

 

행과 연이 사라지는 고독사, 아무도 문장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너울너울 죽어서 백년을 헤아리지 못하는 당신

 

세한도 속으로 쓸쓸히 걸어 들어간다

 

                          * 고영숙 시집 나를 낳아주세요(리토피아 포에지 121, 2021)에서

                                                            * 사진 : 만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