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2)

김창집 2021. 11. 26. 01:24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사랑을 꿈꾸지 않더라도

비는 내리지 우리가 사랑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꽃은 피고

바람은 발걸음을 살금살금 옮겨놓지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더라도

있는 자리에서 사물들은

제 힘껏 삶을 살아나가지

그러나 친구여, 세상 쓸쓸함과

고뇌, 안개 낀 날의 방황

갯벌에 처박혀 있는 폐선과도 같이

외홀로 상처 입는 사람들

우리가 어깨 겯고 볼 부비며

허름한 사랑 한 조각

나눠 가질 수 있다면

세상은 조금씩 추위를 벗으리

비는 아주 맛있게 내리고

꽃들은 황홀하게 비의 숨결에 취하며

바람은 크고 따뜻한 손길로 모든 것을 쓰다듬으리

친구여,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를 불러준다면

 

서둘지 않아도

 

서둘지 않아도 잎새들은

저를 피워낸 나무와 결별을 한다

서둘지 않아도 태양은 긴 그림자를

남길 것이며

때로는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할 것이다

서둘지 않아도 바람은

가다가 돌아오며

먼저 간 바람의 소식도 간간이 전해줄 것이다

누군가는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바람의

맨 얼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둘지 않아도

흰 눈의 군단의 텅 빈 하늘을

수놓는 것을 보라 어디선가는

이름을 접은 새 한 마리

비스듬히 세상을 그으며 날아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언 땅 밑에서도 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물의 꿈이 앙상한 나무들은 여전히 서있게 한다

서둘지 않아도 잎새들이 나무들과 결별한

그 자리에 새롭게 움이 돋아날 것이다

 

기막힌 시

 

미술관 자원봉사 가서

설치미술전 지킴이 하다가

관람객 안내하고 자리 돌아와 보니

내 앉았던 의자

잠시 읽다가 놓아둔 산문집

나대신 고즈넉이 앉아 있는데

! 그게 기막힌 설치미술이더라

 

그러고 보니

오래전 바닷가 모래밭

그대 고요히 앉았던 그 자리

! 그게 진짜 시였던 것인데

그때 숨죽이며 불어오던 바람 소리와

그대 눈동자 속 주춤주춤 지던 노을빛

이게 다 시였던 것인데

 

오래전 그곳 바닷가 모래밭

그대 앉았던 자리

물새들이 종종종 발자국을 찍던

그 따순 온기야말로

내 어쭙잖은 시 나부랭이 같은 건 턱도 없는

참 기막힌 시였는데!

진짜배기 시였는데!

 

 

비는 서로 몸을 섞지 못 한다

지척 간에도 오리무중이다

오종종 조막손을 힘겹게 내밀지만

쉼표 하나의 간격도 무한대이다

비는 비끼리 몸을 섞지 못 한다

간혹 마음의 모스부호를 띄울 뿐

닿지 않을 그리움으로

슬프게 젖어서 산다

비는 비끼리 몸을 섞지 못 하지만

그러나 오랜 그리움으로

풀잎을 적시고 마른 나무들을

적시고 온 세상의 목마름을 채우므로

비로소 한 몸으로 섞여 흐른다

 

군고구마

 

첫눈 오는 날

 

따끈따끈하게 잘 익은

 

군고구마가 되어

 

너의 시린 두 손에

 

나를 온전히 쥐어주고 싶었다

 

불씨

 

초빙(初氷) 무렵

어둠은 길고 날은 추워서

그대와 내가 떨어져 서 있는 거리만큼

미미한 체온의 기미만으로

서로를 겨우 확인할 때

느닷없이 그대가 내어준

입술의 불꽃!

그 순간은 아마도 먼 곳 시린 별빛조차

그대와 나의 둥그런 어깨에 내려와

잠시 숨을 가다듬었을 게다

운명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울울불락(鬱鬱不樂)의 날에도

내가 융융(融融)한 미소를 그나마 간직할 수 있는 건

그때의 불시가 내 푸른 정맥 속

가없이 흘러 늘 처음처럼

불을 지피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삶창시선, 2021)에서

                                         *사진 : 인제 방태산의 늦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