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양동림 시집 '마주오는 사람을 위해'의 시(2)

김창집 2021. 11. 28. 08:21

 

새벽

 

가난한 자는 밤을 기다리고

부자는 새벽을 기다린다?

 

그렇다

힘든 노동이 끝나 밤이 되면

종일 기다리는 가족도 보고 싶고

하루의 피로를 달래줄 소주 한잔도 그립다

날이 밝으면 일 나가기도 전에 월세를 독촉하는

집주인을 마주칠까 두려운 새벽이

반가울 리 없다

집주인보다 더 일찍 일터로 나와

한밤중에야 집으로 간다

기다리는 게 새벽인지 밤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삶 속에서

가난한 자의 새벽은 즐겁지 않다

몸이 기억하는 하루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

자기만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침부터 밤늦도록 일터를 배회할 것이다

 

날이 밝을 때마다 밝은 햇살이 비추어오듯

은행에는 이자가 쌓이고 세 준 건물은

꼬박꼬박 월세 날 돌아올 것이다

비가 와도 태풍이 불어도 구름이 잔뜩 끼어도

새벽은 밝아오고 사람들이 돈을 벌든 못 벌든

월세는 받아낼 것이다

세입자들의 불쌍한 얼굴도 애써 외면할 것이다

그들이 일터로 나가기 전에 일어나

자기가 더 부지런 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벌써 아침이 기다려진다며 밤잠 이루지 못하는 사람

 

다 같이 맞이하는 새벽이지만 너무나 다른

오늘이 또 지나가고 있다

 

 

꿈 속에서

 

판도라 상자 속으로 들어가

다 떠나고 홀로 남았다는 희망에게

물어볼 것입니다

남들 다 떠날 때 뭐 했냐고

나만큼이나 게을러서 상자가

열린 줄도 모르고 한 숨 자고 있었는지

자기라도 남아서 상자를 지키고 싶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시기와 질투와 욕망이 상자를 나와서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희망 네놈도 얼른 상자를 나와야 했다고

윽박질러보겠습니다

희망만 남은 상자를 닫아버린 판도라에게

이 밤 다하도록 열어달라고

조르겠습니다

 

 

자물쇠

 

집을 나서면서

밤새 미소 짓게 했던 꿈들을

최첨단 도어락으로 잠가 버립니다

콩콩 뛰던 마음도 같이 잠가 버립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잠시 이어 놓았던

꿈의 가닥도

차 속에 함께 잠가 버리고 일터에 파묻힙니다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나를 잠그고 세상 모두를

잠가 버렸습니다

 

언젠가 영혼의 울림 있어서

세상의 모든 자물쇠를

한데 모아 잠가버리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굳게 잠긴 자물쇠를 들여다봅니다

 

 

엘리베이터

 

올라오라 시키고 한참을

별렀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지만 그는 미동도 안 하고

 

그대로 자기 자리만

지키고 있었습니다

말을 안 듣는다고 짜증이 났지만

올라오지 않는 그를 어찌하지 못했습니다

이리저리 생각하다 정중히

내려가고 싶다고 버튼을 살며시 누르자

흔쾌히 올라와서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상처 4

   -아토피

 

가려워 긁는 아이에게

긁지 말라

긁지 말라

 

아프다고 가렵다고

하소연하는 아이에게

조용하라

조용하라

 

어디가 가려운지

얼마나 가려운지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긁지 말라고, 조용하라고 했던 세월

 

벅벅 북북

온종일 이곳저곳 긁어대는 아이에게

고작 연고 따위나 발라주고

아프다 소리치는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는 둥

아이의 그 손을 묶어버리고 싶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데

무자년부터 오늘까지 그 긴 세월을

아이는 어찌 살았을까?

 

 

                             * 양동림 시집 마주 오는 사람을 위해(한그루시선, 2021)에서

                                                        * 사진 : 겨우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