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어제는 털머위꽃이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더만
오늘은 아왜나무 잎사귀 끝동에 붉게 물이 오른다
궁륭은 아득하여
일찍이 떠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으니
누구는 그리움으로 단풍 들고
누군가는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몇 장의 낙엽을 떨군다
우주가 잠시 기우뚱거린 것도 같다
궁리는 언제나 답이 없는지라
새벽 찬물로 아둔한 마음을 씻어내니
일그러진 사랑조차도 명경지수다
누항에 살면서 어찌 회한이 없으랴
슬픔도 차곡차곡 쌓으면 풍경이 장려하다
삼 년 묵힌 장독 열 듯 묵혔던 마음 내려놓으니
몇 소절 바람에 실려 저 아득한 가을 하늘도
짐짓 내려와 쉬어갈 만도 하다
♧ 어떤 사랑
1
사랑이여
어눌한 말씀 몇 조각 기워내어
겨우 피워낸 꽃잎 같은 거
덧없는 바람결에 무시로 흩날리니
뻔뻔치 못한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슬픔 같은 거
2
세상의 쓸쓸한 벽마다
네 생의 남루를 걸어둘 수 있게끔
네 슬픔의 무게를 오롯이 견디는
대못으로 박혀 있고자 했다
그러나
어쩌다가 나는
외려 너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네 영혼의 피를 철철 흘리게 하는
대못이 되었단 말인가
♧ 전등사
전등사 대웅전 추녀 귀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는데요
대웅전을 지은 목공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을 원망해
부처님의 도력 아래 평생 벌 받으라고
기원해서 만들어놨다는데요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그 목공이 떠난 여인을 못 잊어
외려 부처님의 공덕 안에서
온전히 지켜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지요
어쩌면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이
봄날 벚꽃 피고 지는 것과도 같아
천년을 증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요
♧ 어떤 가을날
햇빛도 때로는
후미진 골방에 오도마니
처박혀 있고 싶은 걸지도 몰라
네가 떠나고
손꼽아 헤아려보는 세월
영혼처럼 손가락 마디도 다 닳아 없어지고
한 이십 년
다 그리지 못한 풍경 한 조각
그냥 호주머니에 구겨 넣기만 했지
그리움은 영영 폐기 처분될 수 없는
뇌관인 걸까
눈 흘길 하늘도 없이 애꿎은 바람의 등짝만
후려갈기는 마음이여
마음의 실핏줄 터져
무장무장 핏물 배어드는
시린 가을 날
맨살에 예쁜 신발이라도 신겼으면
♧ 겨울 서정
숲은 온통 하얗게 눈을 뒤집어썼다
눈은 새의 발걸음으로 숲의 나뭇가지에
우듬지에 또는 오래 파인 옹이 사이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유순한 짐승처럼
나무들은 눈을 받아 안는다
눈이 숲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숲의 문을 조금 열어보면
보인다, 눈이 나무를 껴안는 게 아니라
차라리 나무들이 눈을 보듬고 있는
크고 부드러운 사랑이
인적 끊어진 겨울 숲
나무들은 종교처럼 은밀하게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눈은 때때로 속수무책의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나무 아래 가볍게 털어놓는다
저 경전과도 같은 고요 속
나도 적막처럼 가만히
깃들고 싶다
*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삶창시선 63, 202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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