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3)

김창집 2021. 12. 3. 00:07

 

가을

 

어제는 털머위꽃이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더만

오늘은 아왜나무 잎사귀 끝동에 붉게 물이 오른다

궁륭은 아득하여

일찍이 떠나간 이들은 돌아오지 않으니

누구는 그리움으로 단풍 들고

누군가는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몇 장의 낙엽을 떨군다

우주가 잠시 기우뚱거린 것도 같다

궁리는 언제나 답이 없는지라

새벽 찬물로 아둔한 마음을 씻어내니

일그러진 사랑조차도 명경지수다

누항에 살면서 어찌 회한이 없으랴

슬픔도 차곡차곡 쌓으면 풍경이 장려하다

삼 년 묵힌 장독 열 듯 묵혔던 마음 내려놓으니

몇 소절 바람에 실려 저 아득한 가을 하늘도

짐짓 내려와 쉬어갈 만도 하다

 

 

어떤 사랑

 

1

사랑이여

어눌한 말씀 몇 조각 기워내어

겨우 피워낸 꽃잎 같은 거

덧없는 바람결에 무시로 흩날리니

뻔뻔치 못한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슬픔 같은 거

 

2

세상의 쓸쓸한 벽마다

네 생의 남루를 걸어둘 수 있게끔

네 슬픔의 무게를 오롯이 견디는

대못으로 박혀 있고자 했다

그러나

어쩌다가 나는

외려 너의 가슴에 깊숙이 박혀

네 영혼의 피를 철철 흘리게 하는

대못이 되었단 말인가

 

 

전등사

 

전등사 대웅전 추녀 귀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는데요

대웅전을 지은 목공이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간 여인을 원망해

부처님의 도력 아래 평생 벌 받으라고

기원해서 만들어놨다는데요

그런데 왜 나는 자꾸만

그 목공이 떠난 여인을 못 잊어

외려 부처님의 공덕 안에서

온전히 지켜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지요

 

어쩌면 사랑하고 헤어지는 일이

봄날 벚꽃 피고 지는 것과도 같아

천년을 증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요

 

 

어떤 가을날

 

햇빛도 때로는

후미진 골방에 오도마니

처박혀 있고 싶은 걸지도 몰라

네가 떠나고

손꼽아 헤아려보는 세월

영혼처럼 손가락 마디도 다 닳아 없어지고

한 이십 년

다 그리지 못한 풍경 한 조각

그냥 호주머니에 구겨 넣기만 했지

그리움은 영영 폐기 처분될 수 없는

뇌관인 걸까

눈 흘길 하늘도 없이 애꿎은 바람의 등짝만

후려갈기는 마음이여

마음의 실핏줄 터져

무장무장 핏물 배어드는

시린 가을 날

맨살에 예쁜 신발이라도 신겼으면

 

 

겨울 서정

 

숲은 온통 하얗게 눈을 뒤집어썼다

 

눈은 새의 발걸음으로 숲의 나뭇가지에

우듬지에 또는 오래 파인 옹이 사이에

가만히 내려앉는다

 

유순한 짐승처럼

나무들은 눈을 받아 안는다

 

눈이 숲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숲의 문을 조금 열어보면

보인다, 눈이 나무를 껴안는 게 아니라

차라리 나무들이 눈을 보듬고 있는

크고 부드러운 사랑이

 

인적 끊어진 겨울 숲

나무들은 종교처럼 은밀하게

서로의 숨결을 주고받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눈은 때때로 속수무책의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나무 아래 가볍게 털어놓는다

 

저 경전과도 같은 고요 속

나도 적막처럼 가만히

깃들고 싶다

 

 

                * 김승립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삶창시선 63, 20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