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행 – 채영선
내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시면
아브라함
약속을 받았느냐 물으시면
아브라함
길을 알고 있느냐 물으시면
아브라함
기억하고 있느냐 물으시면
아브라함
후회하지 않느냐 물으시면
아브라함
기다리고 있느냐 물으시면
아브라함
함께 가자고 하시면
아브라함
♧ 메아리 – 성숙옥
산을 오른다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리기다소나무 군락
만나든 헤어지든 바꾸지 않는 음률이다
겨울 빈 나무들 사이에서 더 뚜렷한 소리
마음은 많이 먹지만 끝가지 못해본 노래다
비켜선 굴참나무가 솟구치는 산길에선
어제와 오늘이 꽃같이 돋고
옛 노래는 설익은 시절을 데려온다
계곡을 타는 물소리를 밟고 오르다 보니
놓쳐도 미련 없는
구름 맞닿은 산의 정수리다
사랑도 처음엔 저리 뭉클뭉클 피어나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지만
누군가 던진 목소리는 물러선 산을 돌아오고
푸른 바람은 그리움의 단추를 풀며 온다
♧ 쓸쓸한 집 한 채 – 채영조
아버지 세상 떠나시고
어머니마저 기억이 흐릿해져
도시로 떠나온 후
홀로 고향집을 찾았다
불 꺼진 채 말없이 앉아 있는
생의 흔적
마당 시멘트 틈을 뚫고 자란 풀
자꾸만 하늘로 오르는 대나무
시간의 흘러도 추억들은 자라고 있었다
출세하려면 도시로 가야 한다고
자식들 하나, 둘 다 떠나보내고
홀로 고향집을 지키시던
어머니의 허리처럼,
벽 틈으로 불어오는 찬바람을 견디며
오늘도 한 세월 지키고 있는
쓸쓸한 집 한 채
어머니 하고 부르면
뒤꼍 어디선가
달려 나올 것만 같다
♧ 벼랑 끝에 등불을 켜들고 – 우정연
90도 경사지, 가파른 산자락
감나무 한 그루, 비수 하나처럼 아슬하게 꽂혀 있다
혹한의 겨울이 여러 번 다녀가고
봄이 되자 불현듯 감꽃이 피었다
꽃 진 자리에 맺힌 열매
제법 대봉감 모양으로 살이 차오른다
주홍빛 계절을 품은 가슴,
폭우 몰고 오는 긴 장마 두렵지 않았다
벼랑 끝에 뿌리를 내린 감나무 한 그루
등불을 켜들고
천 길 낭떠러지 어둠을 불태우고 있었다
♧ 이명, 첫 - 배세복
물살을 가르며 배가 나아가고 있었다
빨리 달리는 배일수록 포말이 길었다
그 위로 숱한 갈매기 떼가
배의 방향을 가로질러 날았다
나도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새는 될 수 없으므로 배를 몰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게 난생 처음 본 바다였다
오늘 드디어 배가 도착했다
이제야 배를 한 척 갖게 된 셈이다
뱃사람인 척 출항을 준비하려 했으나
배는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다
뚜우 뱃고동만 잠깐 왔다 사라져갔다
대신 포말이 한없이 길었다
밤새 갈매기들이 귓속을 들락날락
부두가 되었다
♧ 재활 – 김혜천
누군가를 껴안았을 때
가슴에 스캔되는 감정 그것이 재활이라 했다
나이테의 빼곡한 곡절을 앗아간
화마의 시간이 재활되려면
그 잿더미를 쓰다듬어야 하리라
소멸의 현장에
첫울음이 다시 돋아오를 때까지
벌새가 작은 부리로 물방울을 물어 나르듯
함께 울어야 하리라
다시 나무가 되고 우람한 숲이 될 때까지
* 월간 『우리詩』 2022년 5월호 407호에서
* 사진 : 남방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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