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의 시(5)

김창집 2022. 5. 27. 00:08

 

입춘방(立春榜)을 붙이며

 

이른 아침 햇살풀 발라

대문 양편에

입춘방을 써 붙인다

봄날들아, 내게로 오라고

고양이 눈빛처럼 슬그머니 들어오다 말고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봄빛

 

대길(大吉)하여라

마루방에 대()자로 누워

봄 날짜 헤아린다

새 달력에 붉은 동그라미

치도 또 치고…….

 

 

 

오일장의 봄날

 

, 냉이, 달래, 씀바귀, 돌갓…….

봄나물 이름들 촌티가 난다

맵시 없이 그것들은

고향 들길 떠나와서

난장판 길목에 앉아

생떼를 부린다

콩나물 비빔밥 같은 봄날의 햇살

툭툭 털어내며.

 

 

 

월야(月夜)

 

() 얻어 누워 있는

아내의 창틀에

꽃등 하나 걸어두는 밤

 

몰래 들여다보고

등 돌려 돌아눕고

쌀겨 같은 달빛 한 줌

 

아내 방에 뿌려주고 돌아 나오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달그림자를 보았네

아내의 눈물 자국 같은.

 

 

 

무심(無心)

 

자꾸 몸이 가렵다

돌아눕거나 앉을 때마다

여기저기 가려워

열 손톱 세우고 긁어댄다

마른 비듬처럼 떨어지는 살갗

상념(想念)의 부스러기

손톱에 박히고

때로는 먼지처럼 공중에 날리고

 

긁어낸 피부에

벌겋게 돋아나는 두드러기

허상(虛像)의 꿈 긁어내는 일

빈 그림자 지우는 일

왜 나는

그 일들을 무심(無心) 했던가.

 

 

 

어떤 죽음

 

친구의 딸이 죽었다

폐에 혈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외동딸이었다

친구는 기가 막혀

말이 막혀 울음도 안 나온다고

술잔을 입에 대다 말고

자꾸 문밖을 본다

술집 문 밖에서

아비를 찾아 서성거리는 딸아이

붉은 여름날 저녁

이제 가슴에 묻은

딸아이 이름

한숨처럼 부르는 친구

어쩌겠는가

산다는 일이

소중한 것 하나씩 잃어버리는 일인데.

 

 

                                *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서울문화사, 2010)에서

                                     * 10여년 전 동네 오름에서 찍은 분홍빛 찔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