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춘방(立春榜)을 붙이며
이른 아침 햇살풀 발라
대문 양편에
입춘방을 써 붙인다
봄날들아, 내게로 오라고
고양이 눈빛처럼 슬그머니 들어오다 말고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봄빛
대길(大吉)하여라
마루방에 대(大)자로 누워
봄 날짜 헤아린다
새 달력에 붉은 동그라미
치도 또 치고…….
♧ 오일장의 봄날
쑥, 냉이, 달래, 씀바귀, 돌갓…….
봄나물 이름들 촌티가 난다
맵시 없이 그것들은
고향 들길 떠나와서
난장판 길목에 앉아
생떼를 부린다
콩나물 비빔밥 같은 봄날의 햇살
툭툭 털어내며.
♧ 월야(月夜)
병(病) 얻어 누워 있는
아내의 창틀에
꽃등 하나 걸어두는 밤
몰래 들여다보고
등 돌려 돌아눕고
쌀겨 같은 달빛 한 줌
아내 방에 뿌려주고 돌아 나오다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는
달그림자를 보았네
아내의 눈물 자국 같은.
♧ 무심(無心)
자꾸 몸이 가렵다
돌아눕거나 앉을 때마다
여기저기 가려워
열 손톱 세우고 긁어댄다
마른 비듬처럼 떨어지는 살갗
상념(想念)의 부스러기
손톱에 박히고
때로는 먼지처럼 공중에 날리고
긁어낸 피부에
벌겋게 돋아나는 두드러기
허상(虛像)의 꿈 긁어내는 일
빈 그림자 지우는 일
왜 나는
그 일들을 무심(無心) 했던가.
♧ 어떤 죽음
친구의 딸이 죽었다
폐에 혈이 막혀 죽었다고 한다
외동딸이었다
친구는 기가 막혀
말이 막혀 울음도 안 나온다고
술잔을 입에 대다 말고
자꾸 문밖을 본다
술집 문 밖에서
아비를 찾아 서성거리는 딸아이
붉은 여름날 저녁
이제 가슴에 묻은
딸아이 이름
한숨처럼 부르는 친구
어쩌겠는가
산다는 일이
소중한 것 하나씩 잃어버리는 일인데.
* 김용길 시집 『빛과 바람의 올레』 (서울문화사, 2010)에서
* 10여년 전 동네 오름에서 찍은 분홍빛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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