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의 길
3월
머리엔 늘
까만 스카프만 감긴
아직은 산그늘이 시린 집
혼자 가는 목덜미가 힘없이 늘어져 쓸쓸하다
이정표 없이 우왕좌왕 길을 잃어
솔 숲 가장자리에 앉아
새우잠으로 날을 밝히고
그를 만났다
정확하게 찍어놓은 번지수를 따라
아지랑이 폴폴 날리는 길로 접어들고
어느새 저만치 앞서 가는 바람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밟아간다
♧ 길 위의 길 9
빗물에도 비밀 하나쯤은 숨어
젖은 길 위로 미끄러지는 소리
어디서부터 걸어 왔을까
무너질 듯 느린 걸음으로
비가 내린다
걸어왔던 낯익은 길
우산도 없이 비를 맞는다
거리는 온통
스산한 바람에 흔들리고
밤잠을 설친 시간의 신음소리
빗물에 씻겨간다
늘어진 가로수 사이로
지난밤의 기억을 잊은
쓰러지듯 누운 길에
그리움들이
비에 젖어 축축하다
♧ 길 위의 길 10
처음 폭설이 내린 아침 흰둥이가 찍고 간 동글동글 예쁜 그림자만 남아 있다 그립다고 모여든 유년의 조각마저 하나씩 지우고 푸념 섞인 겨울나무 사이로 빛깔 고운 햇살 하얀 눈을 끌어올리자 잔 가지에서 꼼지락대는 저 작은 진동 움찔 놀라 긴 목을 뽑아 올린 미루나무 아래 숨죽이고 기다리던 봄소식들이 하얗게 입김을 뿜어댄다 아직 떠나지 못하는 겨울 등짝에 자근자근 눌러쓴 메시지 차가운 바람소리로 주르륵 흘러들어온다
♧ 길의 변론
포장마차 밑으로 길 하나 걸어간다
매일 같은 시간
등이 굽은 노인 휘어진 길을 돌아
가로등 불빛마저 잘려나간
어둡고 시린 벽을 따라
느린 걸음으로 절룩거리고 가는
발밑으로 그림자 하나 머물다 사라진다
♧ 야망, 지독한 병
훈장처럼 가슴에
야망의 꽃을 피워낸 그대 행복한가
하수구 틈새로 비집고 올라오는
역겨운 냄새 같은 불치병
저 지독한 병은 어떻게 전염되었는지
어두운 곳에서 껍질 깨고 나온 말, 말들
홍매화 꽃잎이 하얗게 질렸다
바람에 가려진 꽃비가 내리던 거리
눈비랑 눈바람 세상 하얗게 씻어 놓고
마지막 메시지를 남긴다
독버섯 같은 야망의 꽃에는
나비가 찾지 않는다는 것을
* 황길엽 시집 『비문을 읽다』(전망, 2007)에서
* 사진 : 붉은병꽃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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