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풍
내게는 아무도 모르는 애인이 있다
그대가 애인임을 들키면 어쩌나
그 흔한 소식도 쓸 수 없다
한 줄의 시로 두드리면
들켜버릴 것 같아
늘 가슴 한 자락 펼쳐 놓지 못했다
그대 따라
계곡 따라
우듬지까지 올랐지만
그대는 간데없고
붉다가, 붉다가
물속에 떨어진 이파리가
내 안에 붙어버렸다
내려오는 산길, 물이
작은 절 안으로 흘렀다
그 길 끝 단풍나무 아래
석불 한 분
두 손 포갠 채
붉게 타고 있다
♧ 어떤 배웅
전봇대에 숨은 외줄기 눈물만이 그녀를 배웅한다
무언가에 떠밀려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
저만치 밀려난 생의 변두리에서
말없이 붉은 그림자로 서성이다가
광차에 밀려 하늘 길 떠나간 광부의 청춘,
그보다 몇 곱절 무거운 자신의 폐차를 질질 끌고간다
등 굽은 친정아버지 초승달을 머리에 달고
사라지는 그 여자 꽁무니를 환하게 비추는 달빛에 기대어
온통 폐탄 투성이인 언니의 생울음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다
♧ 소록도에서 – 유용주
끝까지 왔습니다
산다화 한 묶음 그대 앞에 바칩니다
호랑가시나무 붉은 열매는 그대 향한 제 마음입니다
병원 뒷마당에 핀
철없는 철쭉은 누구를 위해 피었을까요
뭉크러지고 반쯤 썩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소설 지나 동지 입구에 선 누더기 한 생애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소리 죽여 들고 나는 바닷물은 치욕이 없는데
궁형에다 생체실험까지 당한 제가
갈 곳이 어디 있습니까
제 인생은 언제나 바닥이었습니다
절명의 동백꽃 밑에서 다시 한 번 생이 주어진다면
청산도 손죽도 거문도 추자도 제주도 마라도 이어도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요
그대 영정 앞에 뚝뚝 부러진 목숨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귀먹고 눈멀어 코와 입, 생쌀 넣을 때까지
엎드려 울어볼까요
눈물소금 찍어먹고
진창에서 바다 끝까지 기어 가볼까요
지금부터는 긴긴 동면의 세월입니다
산다화 속절없이 눈 되어 떨어지면
그대, 한 점 섬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요
선연한 동백꽃으로
피, 피, 피,
피어날 수 있을까요
소리도
냄새도
빛깔도
그림자도 없는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가요
♧ 덕담시대
개구리 둘이서 콩밭을 뛰어다녔다 늙은 개구리는 아주 오랫동안 심심했던지 콩대 져 나르는 동안 개굴개굴 잘도 울어댔다
그거 알아? 개구리끼리는 울음소리 서로 밸 때까지 우는 거. 그래야 상대 마음까지도 알아보는 거여. 처음엔 우는 법을 몰랐지. 배고파서 창자창(唱)한 자락 읊고 있으면 이웃개구리들이 들여다보고 한참 울어주던 시절이 있었지. 자네는 금방 일어날 거여 젊고 부지런하잖은가. 그 울음 한 사발에 힘은 남아돌더라고 한 뼘 뙈기밭도 커 보이더라고. 말 한마디가 밥이더라니까. 콩도 자기들끼리 울어주면서 여무는 거여. 알을 다 쏟아내고 아궁이에서 탈 때 소리 지르는 것도 다 울음소리가 밴 때문이여. 서로 좋은 소리 해가며 살아야 하는 거여. 어디 가든 그래야 하는 거여. 곡식 한 됫박은 아무것도 아녀. 말씀 한 됫박이 최고인 거여. 새끼랑 마누라에게 자해. 나이 먹으니까 대신 울 줄도 알게 되더라. 요샌 꿈도 대신 꿔주는데 거의 다 산거여.
개구리별 총총 돋아나는 밤 이슥토록 개구리 논이 요란하였다
♧ 병할치 - 이명재
-예산말 3
그거 아남?
내가 젊어서니 말여.
경상도서 군대 생활을 힜거든.
근디 말여.
군대 앞이 구녕가게가 있었어.
틈이 나믄 달려가서 술을 먹군 힜넌디 말여.
그 자리서 먹으믄 술을 대접이다 따러 주구
병값을 빼줬어.
근디 바쁠 적인 거서 뭇 먹구 병째루 사다가니 먹으야잖어.
그땐 주인 여자가 병값을 따루 받었넌디
우리 충청도 사람덜이 술을 사러 가믄
“병할치 주슈. 병할치 주슈.”
그맀거든.
그러닝께 경상도 친구덜이 그 말을 뭇 알어듣구는
“병할치가 뭐여?”
허군 물었어.
자네 말여, 병할치가 뭔 중 아남?
*충남작가시선 7 『미소 한 덩이』 (심지, 2012)에서
*사진 : 설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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