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짜이 보라 – 김효선
첫 선물로 받은 상자가 텅 비었다면
상자를 먼저 버릴까 눈물을 버릴까
새처럼 지저귀는 모국어를 배우면
손가락으로 그린 동그라미가
물구멍처럼 아득해진다
바다에 바친 제물이 갈치 떼가 되어
만선의 바람을 타고 서쪽으로 당도할 때
뼛속까지 원죄가 박힌 전생을 물어
대정몽생이*라 불렀다
태어나지 않은 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천기天氣
착한 아이들만 빨래 바구니를 들고 휘파람을 따라 갔다
가도 가도 더할 나위 없는 나쁜 날씨를 훔쳐
대지보다 더 검고 질긴 외투를 입었다는 몽생이
계절 없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문패 사이로 들리는
짜이 보라 짜이, 무사 경햄시**?
폐에 가득 찬 모래를 어쩔 수 없어 내뱉는 쇳소리
바람의 모국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까마귀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만 세는 사람들은
한 나무가 품은 생각을 놓쳐 다른 열매가 달리고
사실
현무암과 휘파람이 한 핏줄이라는 소문은 놀랍지도 않다
금기를 깨야 완성되는 유일한 출구니까
우리는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먼 불빛으로
영원이라는 갈증을 갖게 되었지만
서쪽은 서쪽의 힘으로 큰다
모살밭에 과랑과랑 쏟아지는 벳 맞으며
닿고 고이고 차마 뱉지 못한 말들이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바람의 입을 빌려
속죄하는 곳
가장 마지막까지 타오를 사막의 별처럼
짜이 보라, 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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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정은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을 일컫고, 몽생이는 조랑말을 뜻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이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강인함을 의미하여 부르는 말이다.
** 쟤 좀 봐, 쟤는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니?
*** 모래밭에 따갑게 쏟아지는 햇볕 맞으며.
♧ 첫물질 - 허유미
노래를 따라가 보니 물속이었다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일요일의 아침 햇살 같은 물빛이었다
엄마는 담배를 물고 불안으로 늙고 있었다
섬에서 늙는다는 건 비밀이 될 수 없다
덜 먹고 덜 기대하고 덜 꿈꾸는 것이 비밀이었다
비밀을 없애기 위해 물에 드는 여인들의 노래는
바다의 상상이었다
여인들의 얼굴은 눈이 부시었다가 흐릿해졌다
명령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낭만도 아니었다
순전히 노래가 가는 방향이 물이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비밀을 나눌 곳이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했다
돌고래만 지나는 물길은 잊어도
노래를 잊지 못하는 건 바다의 상상 끝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마주한 여인의 표정이 나이고
나는 여럿이고 봄밤이 가라앉고 있었다
노래는 춤인 듯하고 춤은 물의 윤곽인 듯했다
거기서부터 알면 된다는 듯 손금이 늘어났다
서툰 만큼 울어도 되는 곳이었다
열다섯을 지나는 그곳에 나는 있었다
♧ 머체왓*에서 – 김애리샤
수레국화가
바람 모양으로 흔들리다
정지하는 순간, 그곳의 모든 것들
당신의 배경이 되었다
멀리 보이는 거린족은오름과
더 멀리 보이는 백록담이
당신의 배경이 되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다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돌들이
넓은 들판을 이룬 곳
머체왓
이곳에선 누가 돌보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자라나고
햇살만큼 피어난 야생화들이 빛난다
꽃들이 여기에 뿌리내린 까닭이나
계곡을 스쳐간 고요의 시간들을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그대로일 때
그대로여서
더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머체왓 폭낭 아래 벤치 같은 사람
봄이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수레국화 같은 사람
당신이 그렇다
---
*서귀포시 남원읍에 위치한 숲길.
♧ 란제리 곶자왈 – 고주희
뿌리가 다 드러난 길을 걸으면
순례자와 산책자의 어디쯤,
바람이 불면 모래 우는 소리가 나는 사막을
나뭇가지로 감아올린 열대를
어딘가에 두고 오는 중이에요
입구에 들어섰는데 출구가 겹쳐
잠깐 눈인사를 나눈 사람들, 너무 외로워
잔가지 뻗듯 손을 내밀고 싶지만
천개의 계단을 오르면 물고기와 상형문자와 붉은 산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나뭇잎들이 몸을 불리는 시간
겨울이 아니어도 가끔은 눈처럼 희지만
녹지 않는 것들이 뭉쳐 다니기도 하는 곳
새우란에서 시작한 말놀이가 란제리로 이어지는
아름다움이 파면되는 것 사이의 악력握力을 생각하다
노란 색을 과하게 쓴 일을 떠올리며
난 그저 하루를 조용히 보내고
밤에는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에요
하루에도 많은 것이 바뀌는 이곳에서
손을 꽉 움킨 또 다른 손의 겨울을 녹이며
땀이 흐르는 이마가 되는 곶자왈
나무의 경로를 따라 나체에 이르는
육체와 원시림의 순서를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요, 당신
완결한 것도 무결한 것도 아닌 것들이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걸을 때
딱따구리가 내는 소리만으로도
나무의 살결을 한 꺼풀 벗겨지고 있어요
*허유미 고주희 김애리샤 김효선 시집 『시골시인 – J』 (걷는사람,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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