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 그리고 노인
그 봄날은 길었네
게으른 해는 중천에서 졸고
보리 이삭 팰 무렵 뻐꾸기는
왜 그렇게 울어쌓는지
누이는 뻐꾸기 소리로 떠나고
아이는 뻐꾸기 둥지를 찾아
날도 없이 산속을 헤집고 다녔네
나무들이 축 처진 어깨 위로
해도 지쳐서 늘어지는 한낮
개개비 둥지는 비어 있고
가슴에 뻐꾸기 소리만 채우고 왔네
시골 포구는 항구로 개발되고
엔진 소리 먹먹한 방파제에 앉아
멸치 떼 붐비는 저녁 바다를 바라보네
빈 가슴에선 바람소리만 울고
봄은 가더니 오지 않고
누이는 영 소식이 없고
먼 수평선에 불을 켜는 뻐꾸기 소리
♧ 빈집 7
구름처럼
흐르는
집 한 채 있네
눈비에도 바래지 않고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는
바닷가 늘 그 자리에
해조음이 흐르는 집
그리우면
몸을 뉘였다 오고
외로우면
울다가 오는
먼 날의
집 한 채 있네
♧ 날개 1
참새 한 마리 쪼르르 날아와서
대야에 남은 물로 날개를 파닥이더니
바람 시원한 울타리에서 깃을 말쑥하게 고르고는
포르릉, 누구에게로 날아간다
돌아보니
내 몸에 더께 진 때
찌든 곰팡내가 난다
내 몸 하나,
한 세상 잘 살다가
깨끗이 빨아서 돌려드릴 옷
피부가 벗겨져라
때를 밀면
참새의 날개 하나 얻을까
포르릉
그에게로 날아갈까.
♧ 바람 2
나를 깨우는 것은 바람
내 안에 출렁이는
바다가 그리워
집을 나선다
검은 구름은 살같이 달려오고
물새도 떠난 겨울 바다에
하늘 높이 솟구쳐서
부서지는 허무의 불길
그렇게 낡아온 심해의 퇴적
묵정밭을 갈아엎어서야
박제된 의식의 부서지는 아픔으로
다시 잉태의 꿈을 꾸나니
바다는 어머니의 가슴으로 운다
그 오랜 인고의 힘으로
현무암은 물속 깊이 뿌리를 세우고
파도치는 허무의 시간을
부유하는 바람의 날갯짓이여.
오늘도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어
나 얼른 대답하고 길을 나선다.
♧ 나 그런 여자를 안다
보고 있으면 잠길 듯이 깊은
눈이 호수 같은 여자를 안다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면서
나나무스꾸리의 물망초를 듣는
비쩍 바른 몸만 가진 여자
문학을 좋아한다며
시인들의 배설로 도배 된 북새통,
저 60년대의 ‘주막’의 주인인 여자
문인들의 난삽한 잡설에 끼어
밤늦도록 자리를 뜨지 못하는 여자
사랑해서 불행했던 여인 카츄사와
황량한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떠오르는
왠지 부축해줘야 될 것만 같은
버들잎 같은 그런 여자를 안다
* 김종호 시집 날개 (푸른사상, 201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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