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꽃 – 민구식
외딴 섬
고유명사로 피어
눈부시지 않아도
봄을 하얗게 채색하는 비밀
널 닮은 그 섬에 숨어
바람꽃이 되어보고 싶다
다리 한 뼘 물 밖에 걸치고
다른 쪽은 물 건너 섬에 닿아
깊이를 거슬리는 통신
연줄처럼 닿을까
안부를 안고 파문을 밀며
바람의 발자국이 이름을 새기는 수면에
꽃으로 오선지를 그립니다
바람은 수평선 너머로 가고 싶은
내 속 가득한 그리움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 청노루귀 – 정순영
유년 시절의 고향동무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지리산 형제봉이 또렷이 보이는
강 언덕에 앉아
눈시울에 방울방울 맺힌 추억을
양지바른 언덕에 두고 왔더니
겨울을 잘 견딘 청노루귀가
보송보송 그리움의 솜털 꽃대를 올려
자줏빛 봄 울음을 운다네
자줏빛 봄 울음을 운다네
♧ 설악의 가을 – 채들
자욱한 발걸음으로
무산선사霧山禪師 다녀가신 후
무슨 말씀 빽빽이 남기셨길래
설악의 귀때기가
빨갛다
♧ 황학동 - 권늘
도심 담벼락 밑에서 고개를 바짝 쳐든
천원의 정찰正札이 당당하다.
여기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다시 한 번 정색을 하고 포즈를 취한
구겨진 상품들이 피곤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쉰다
최고의 자부심으로 무장한 상인들의 아픔이 간간이
묻어나는 땟국 흐르는 장터는 모두가 사연이다
맥을 찾아 하나 둘 몰려든 채굴꾼들의 매서운
눈빛이 갈래로 이어진 골목마다 번득인다
이미 제 몫을 다해 숨이 끊기어 가던 구찌 가방은
최고 가문의 출신을 자랑하며 좌판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오만 원의 가격을 짊어진 채 명문가의 품격을 포기하고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애처로운 표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벼룩들은 도성 밖으로 밀려난 관우의 사당을 따라
스스로 그곳에 자리를 틀었는지 모를 일이다
골목을 돌고 돌아 저 길 건너 청계천까지 장사진을 친
허기진 물건들은 제 스스로 호객을 한다
사용의 흔적은 새것의 뻑뻑함을 없앤
노동의 대가라는 구매원칙에 부합되는 순간
벼룩의 멍에를 벗은 녀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초여름 겁 없는 햇볕이 너무 강하다
♧ 그녀가 운다 – 이경애
그녀가 운다 자칭 속물이라며
세상 어렵게 살면 한이 없고, 쉽게
살자 맘먹으면 또 그렇게 살아지는 거라며
뼛속까지 속물인 양 징그럽게 웃던 그녀가
펑펑 운다
벤치 위 어지러운 은행잎을 손바닥으로 쓱쓱 지우고 주저앉아
푸르다 녹아버릴 것만 같은 하늘 한 번 보고
야트막한 언덕 위 수북한 산국더미 힐끗 쓸어보더니
느닷없이 – 히야! 세상 기가 막히게 곱다! 하고는
느닷없이 운다
- 온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워지는 동안 우리는 뭘 했을까
푸르른 청보리밭 거침없이 밟고 온 그녀가
불붙은 당단풍 한 잎보다 작아진 그녀가
빈 가지에 걸린 바람 소리로
자꾸만 운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겠냐마는.
* 월간 『우리詩』2022년 6월호(통권 408)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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