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게 – 허유미
포구여자들은 이름이 많다
추진 요 아래 무딘 종소리는 누가 묻고 갔을까
성게 여물을 꺼내는 건
혼잣말을 보는 것 같다
말도 오래 물끄러미 바라보면 여문다
포구에서 이별은 사랑이 여문 것이다
좀처럼 물 위로 드러나지 않는 성게가
반쯤 지워진 얼굴처럼 검푸르게 바위에 돋았다
사랑과 사랑이 커져 서로를 짓누를 때 터져 나오는 말을 먹으러
목에 걸린 이름으로 생과 사를
깊숙이 물에 넣는 것이 포구여자들의 억양
겉마음을 속으로 속마음을 겉으로 보내며
기어이 사는 성게 가시는
혼자 쓰는 언어처럼 독이 서렸다
한 사내가 사라지고
긴 밤의 표정으로 금이 간 그릇을 채우는
여문 말들의 무게에
섬의 미간이 좁혀진다
♧ 블루 툰베르기아*에 내리는 비
언젠가부터 내 잠은 가짜라는 혐의가 짙다
베개에 머리를 두면
여러 갈래 길에서 헤매고
나눠 마실 수 없는 잔을 붙들고 그대로
얼어붙는 북극이 되기도 한다
발바닥은 내게서 가장 가까운 양지陽地
병적으로 짐을 꾸릴 때마다
그곳이 먼저 녹아내리는 이유를 알겠다
본 적 없는 빙하의 무너짐이
예고편으로 다가올 때
너는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사라지고
녹는 눈사람의 자세가 여기저기서 속출한다
주저앉는 나뭇잎
블루 툰베르기아 잎사귀 튕겨 나가며
눈이 되다 만 것들이 난립하는 형식
동그란 물그릇 속에서
파과하는 어느 초여름
단번에 써지는 시가 진짜 있었다
빙하의 반대편인 곳에서
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빗소리를 찾아
장대비도 웃비도 아닌
시름겨운 어느 겨울
푸르다 못해 검게 변해 버린 입매를
시푸른 나뭇잎으로 떠받쳐 놓고
진자 비가 내리면
잠을 이룰 수 없는 나
지구 반대편 식물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골라 들으며 깊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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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글로리(Thunbergia battiscombei)라 불리는 넝쿨꽃나무.
♧ 모서리를 걸어요 - 김에리샤
느리게 걸어서
나란히 걷지 못해서
발바닥엔 언제나 물집이 돋아나요
걸음이 느린 나는
모서리를 걷는 사람
비가 내린 것처럼 미끌미끌한 거기에서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하는
독감 같은 날들을 앓고 있어요
지치지 않고 터지는 물집들을
밀어내지 못하며 나는,
나를 속여요
발바닥을 정성스럽게 닦아요
당신이 아주 잠깐 뒤돌아본 오늘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까요
가슴을 닫으니
모든 게 캄캄하게 빛나요
생각을 멈춘다는 것
내 속에서 그대를 꺼낸다는 것
천천히 잊는다는 것
그 모서리에 서서 나는 다시 걸어요
당신과 나란히 걷지 못하는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 사람
그대만 모르게 그대를 사랑하는
느린 사람
♧ 언박싱 모슬포
너무 빨리 자라는 사막이야, 촉진제를 달고 온 바람이야
복숭아는 시고 떫은 사람을 닮았고
무화과엔 못 먹는 개미가 들끓었지
풀숲마다 바람처럼 날아다니며 뱀은 고백했지
내 허물을 덮어 주면 네 발을 감춰 줄게
텀블링하며 학교로 사라진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떨어진 발을 주워 들고
뚜벅뚜벅 꿰매기 시작했어
짐승의 걸음을 멈춘 목소리였어
얘야, 얼른 두 손을 질긴 가죽 주머니에 넣어 두렴
등이 굽은 날씨에서 엷은 피비린내가 스쳤지
닫아 둔 창문에서 내가 태어난 소식이었어
거친 바람은 거친 말을 쏟아내며
어디까지 팔을 뻗어야 까만 눈빛이 열릴까 고민했어
낯선 웃음이 헤프게 달려들 땐 깊고 깊은 용천으로
조곤조곤 여린 이파리들을 흘려보내야 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뼈가 억센 자리돔도
두불콩에 간장을 넣고 자작하게 졸이면
눈빛이 달라지는 세계가 있다는 걸 너는 아니?
너무 빨리 자라는 모래를 심었지 굳기 전에는 악수할 수 없는
* 허유미 고주희 김애리샤 김효선 시집 시골시인 – J (걷는사람, 2022)에서
* 사진 : 해녀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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