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어느 화가의 물방울처럼
세상의 모든 꿈들이
온통 영롱한 물방울로 보인다.
아름다운 사람아.
저지오름 길목에서 윤행순
♧ 고해성사
-간호일지 1
사십 초반쯤 될까, 그을린 김씨는
“마신 술을 깨고 싶다” “주사를 놓아다오”
형광빛 덜 풀린 취기 두 눈이 허물어진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저 혼자 들어선 병실
그리움이 술처럼, 술이 또 어머니처럼
수차례 고해성사도 소용없는 저 절규
♧ 동병상련
-간호일지 2
하룻밤 새 주객이 전도되는 것을 봤다
남편 손 닦아주며 간호하던 아내가
오히려 병이 또 도져
수술장으로 들어간다
남편도, 아내도 잠시 눈을 감은 이 시간
시한부 내 어머니 수술하던 그날처럼
가을 끝 동병상련의 그 등불을 지킨다
♧ 초로기 치매
-간호일지 4
아침 여덟 시쯤 출근을 하자마자
젊고 건장한 남자 응급실에 실려온다
한 움큼 햇살도 함께 구급차를 따라온다
“나는 소방관이다” 첫인사를 건넨다
그런가, 그런가 하고 그 말을 믿었는데
내 얼굴 대할 때마다 소방관이라 또 그런다
이 사람은 어느 일터에서 근무했던 사람일까
때때로 링거병을 소화기처럼 둘러메고
병상에 분사를 하는 진단명
초로기 치매
♧ 간호사도 가을을 탄다
-간호일지 6
사실은 간호사도 가을을 타는 거다
사랑한다 그 말조차 단풍처럼 떨군 저녁
허전한 나뭇가지에 링거병을 꽂고 싶다
♧ 간호사의 하루
-간호일지 7
간호사의 하루는 누가 간호해주나
환자들 욕지거리야 한쪽 귀로 흘리지만
밤새껏 아프단 소리
이젠 내가 더 아프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응급벨
어느 쪽이 먼저인지 어느 쪽이 나중인지
벨소리 벨소리 겹쳐 히어뜩한 허혈증
논문도 시 한 편도 직장 일도 심근경색
의사도 어머니도 처방전이 없는 날
하루쯤 날 받아놓고 심초음파 찍고 싶다
* 윤행순 시집 『간호사도 가을을 탄다』 (문학과 사람,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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