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체골 제주참꽃 - 오승철
방선문 ‘영구춘화’야 소문날 만큼 났지만
한라산 그 반대편
서중천변 숨어들어
봄이면 도둑눈 털고 출몰하는 저걸 어째
저걸 어째 이 사람아, 저 꽃 발톱 저걸 어째
병아리 채어가듯 한 마을 다 채갔나
봉분만 남은 머체골,
돌담 올레 저걸 어째
은근한 약불인데
자배봉도 태우려나
그때 그 4월 들녘 섭섭하신 아버지
박달래 오가는 길목 여태 번을 서는가
♧ 고냉이찰흙 - 문순자
엔간한 비바람쯤 이골이 난 섬의 서쪽
옹기마을 신평리엔 연못도 항아리 같다
긴 세월 흙 파낸 자리,
고향 하늘 앉은 못물
저들은 제주점토를 고냉이찰흙이라 한다
부뚜막 기웃대다 혼쭐난 들고양이
홧김에 앙갚음하듯 싸지른 똥만 같은
그 흙으로 구웠겠다
잘 여문 이 물허벅
어쩌다 허벅장단 팽강팽강 피어나면
어머니 춤사위 따라 별자리도 휘어졌다
한 번쯤 금이 안 간 청춘이 어딨으랴
잣밤나무 꽃 향기 울담을 넘는 봄밤
밤새낭 우리집 주변
아~응 아응 떠돈다
♧ 강정, 그 이후 - 조영자
그래도 고향이다, 강정은 고향이다
고향은 누구에게나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건지
범섬도 돌고래 떼도 비켜 가는 강정 바다
나는 단발머리 중학생 해녀였다
외상으로 들고 온 테왁 하나 둘러매면
마을은 바다 한켠을 나에게 내주었다
야트막한 그 바다 자그마한 숨비소리
서귀포 매일시장 보말 몇 줌 팔고 나면
못 본 척 등을 돌리던 웃드르 출신 어머니
노랑 깃발 태극 깃발 여태껏 펄럭여도
강정천 줄기 따라 은어 떼는 돌아왔다
밤이면 방파제 너머 집어등도 돌아왔다
♧ 소리를 보다 – 김영순
수업 중에 자꾸만 걸려오는 어머니 전화
몇 번이나 대답해도 귀가 멀어 막막하고
목소리 크게 내지 못해 나는 또 먹먹하고
보청기 주파수는 어디로 향한 걸까
부재중 문자를 따라 한달음 달려가면
-일 없다, 밥이나 먹자
이 말 저 말 궁굴리는데
-안 들린다면서요? 지금은 들려요?
저녁밥 먹다 말고 내 얼굴 빤히 보다가
-입 모양 보면 다 알지
순순히 고백하신다
♧ 어머니의 가을 - 강현수
주인이 떠난 것을 과수원도 아나 보다
해마다 비상품이 상품보다 늘어 간다
이문이 없어도 좋다 출근하던 아버지
아버지 가위소리 어머니 가위소리
작년엔 또각또각 연애질 소리 같았다
그 소리 그리운 건지 가위 놓은 어머니
풍작은 아니어도 평작이 욕심인가
통장으로 처음 들어온 어머니의 성적표
가을은 늘 청맹과니 저 혼자 잘 익는다
*정드리문학 제10집 『바람의 씨앗』 (황금알,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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