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산림문학' 2022년 여름호의 시

김창집 2022. 6. 25. 06:27

 

거위벌레의 편지 - 김영란

 

떡갈나무 숲을 걷다가

햇볕 잘 드는 모서리 벤치

나뭇잎에 돌돌 말려 떨어뜨려진

아주 쪼그마해 눈에 뜨이지도 않던 네가

내 눈에 들어온 거야

반갑게도 널 풀어 헤친 거야

포대기에 아기를 감싸 놓은 모습이었어

 

그대로 접어서 저를 놓아 주세요

 

그 말이 귓가에서 빛나더란 말이지

내 새끼손톱보다 작은 거위벌레가

떡갈나무 잎을 종이 접듯 꾹꾹 눌러 말아

알을 낳고 발걸음 멈추게 하는 숲 속,

둥글디 둥근 요람이었어

 

옷 바구니 안쪽의 숨소리가

날 들뜨게 했어

네가 올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아는 만큼 보이더란 말이지

 

 

 

바다의 품속 - 김용학

 

강물은 해안선에 다가가

갯벌 속에 제 몸을 내려놓자

바다는 모든 것을 품어준다

 

바다가 넒은 품을 벌린다

가슴이 파랗게 멍이 들수록

바다는 나를 품고

나는 바다를 안는다

 

어떤 잡념도

거추장스러움 없이

무념무상에 빠져 든다

 

지쳐버린 내 마음

쉬어 갈 수 있는 곳

고마움 남겨놓고 돌아 선다

 

오늘 따라 파랗게 살아나는

어머니의 품속이 더욱 그리워

 

 

 

나무들의 사랑 윤준경

 

5월 숲에서 보았네

나무들의 사랑을

 

사람들은 사랑에 목숨을 걸지만

나무들은 사랑 앞에 성자聖者가 되네

죽도록 사랑해 라는 맹세도 없이

백년 천년 사랑을 하네

 

사람을 위해 씨를 뿌리는

순하고 향기로운 유전자

다른 나무와 손을 잡아도

새나 벌레를 품에 안아도

미움도 질투도 상처도 없네

 

5월의 숲을 바라보며

저녁쌀을 씻으면

저기 산허리 이팝나무

열댓 두리반 흰밥을 짓네

 

소유도 지배도 굴종도 모르는

나무,

사람의 사랑에 실패한 내가,

질투와 화염에 넘어진 내가,

다음 생애에 꼭 나무로 태어나야 할

이유라네

 

 

 

깨진 모서리를 보며 - 이성이

 

몇 년 째 보았던

깨진 계단 모서리가

새삼스럽게 검게 반짝거린다

마치 오래된 흉터처럼

떨어져나갈 때 날 섰던 부분은

반질반질 닳아 반짝이고

날을 밀어 올리던 골은

먼지들이 굳어서 검다

시간은 날을 깎으며 동시에 골도 메운 것이다

어쩌면 모든 날카로움이나 적의는

돌아가는 길을 제 뿌리로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무심코

발바닥으로 문질러보며 느끼던 신선함도

닳아서 둥글어졌다

나도 손만 닿으면 아프던 상처가 있었던가

지금은 깨진 부분과 계단의 선도

부드럽게 연결되어 키를 맞추고 있다

골도 낮아지고 날도 낮아져서

 

 

 

꽃담 2 정순철

 

벽 말고 담장 말이에요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야트막함 담장이 좋아요

 

그윽히 서로 눈 마주치는

 

그런 담장 말이에요

 

담장 두께만한 거리는 한 뼘씩 서로간에 놓아두고

 

그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야트막한,

 

그런 담장 말이에요

 

 

                                                   * 산림문학2022년 여름(통권 4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