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의 시

김창집 2023. 2. 17. 00:24

 

 

시인의 말

 

 

말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말산업 국문 문창

돌아보니 모두 말이다.

 

말의 눈동자에 빠져들어

씻기고 먹이며 말 아래

있을 때가 행복이었다.

 

말에 진 빚을 무시로

갚아 나가야겠다.

 

 

202212

장한라

 

 

 

 

말들의 휴가

 

 

들뜬 마음 눌러두고

함께 오래 마주 봐야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고생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날들 핥아주며

느긋하게 풍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뒷발굽도 느껴봐야지

 

마방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안개와

눈 감고도 훤환

부대오름 우진제비오름 길을 지우며

오늘은 조천 바다로

내일은 표선 바다로 미끄러져야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고

간섭 없는 곳에서

들숨 날숨 껌벅껌벅 눈썹으로 헤아리다

하품 길게 하고

낮잠이란 게 어떤 것인지

별이 뜰 때까지 늘어져 맛봐야지

 

 

 

절영마絶影馬

 

 

  오늘 당신의 우울을 안장에 얹고 달려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건 감춰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발굽쐐기에 낀 모래알 같은 것, 이별을 예고한 바람과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바람을 맞서며 푸르디푸른 바다로 내달려요

 

  깊고 굵게 파인 발굽자국 파도에 씻겨가듯

  이십일 세기를 위로하며 허옇게 흩날리는 눈발들

  한순간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날리고

  당신의 품격을 발산하세요

 

  굴레의 모서리가 바다 속으로 잠기는 사이

  훤히 허공을 비추던 불빛, 천길 어둠에 잠길지라도

  행여 멀리 당신의 계절을 헤매다 고삐를 놓칠지라도

 

  그림자의 그림자 흑암을 달려

  적당히 위로받는 한때

  우리, 불어오는 숨결을 뜨겁게 껴안아요

 

  분명해지는 세계의 좁은 틈

  돌이킬 수 없는 가난한 영혼에 물린

  재갈을 풀고 재갈을 묶고

 

 

 

거세마의 퇴근길

 

 

어설픈 박자

팽팽한 고비

싫다는 말 한마디 못한 채 장애물을 넘는데

등줄기를 타고 꼬리뼈로 이르는

당신의 오만한 생각

우승만을 생각하는 시선이 따갑다

 

마음 둘 곳 없는 운명을 읽으며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조용히

어둠도 모르는 발정의 시간을 감춘 채

눈물 꿀꺽 삼키고

채워진 재갈을 깨문다

 

분노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간

왜 사느냐는 물음표를 달고

집으로 돌아가지만

식어버린 밥상과

편히 쉬고 싶었던 베갯머리는

청구서를 내민다

 

깊은 잠만이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닳은 편자와 슬픈 눈망울 감추어 두며

 

 

 

시작의 말

 

 

사람의 마을에 이르러

함박눈 따사로움이

눈물로 와닿는다

 

설원을 내달려

고독 불안 후회 상실을 태우고 떠나는 밤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향해 달릴까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도서출판 상상인,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