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비의 밀도
나비를 펼치면 헛꿈이다
꽃의 고요를 훔친 자
귀인(貴人)은 그렇게 온다
돌사자를 어깨에 이고 이마에 두 눈을 그려
가시밭길을 뒹굴고 여린 것을 이끌고 병들고 쇠잔한
늙은이를 부축하고
회심곡을 부르면 쟁쟁 바라 소리가 나며 아픈 곳에 물
병을 부어주며
돌 속에 두 다리를 묻은 용두관음
두 눈을 부처처럼 내리깔고
돌사자를 타고 불의 필체로 꽃을 채우는
나비는 모서리가 많다
나비는 한 번 죽은 마음
♧ 첫사랑 1
나는 자주 빛났다
내 심장에
이빨 자국이 나 있다
벽지 무늬 속에서
검은 짐승들이 뛰쳐나온다
커다란 쇠망치를 들고
내 눈 속의 짐승을
차례로 내려쳤다
춥고 따스했다
한쪽에 빙하가 가득했다
12마리의 개들이 사시사철 짖었다
♧ 동백 전언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었다
오후 내내 폭설이었다
집에서 앞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마의 흉터가 선명했다
어릴 적 담장에 핀 동백을 따다
커다란 돌이 내 이마에 떨어졌다
흰 눈에 떨어진 선혈이
느리게 꽃을 읽어 내려갔다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다 보였다
나는 꽃의 끝이었다
동백을 보면
오줌이 마려웠다
첫 생리를 시작한 날도 동백이 피었다
숲을 더럽히고 싶었다
아플 때마다 꽃이 피었다
동백이 피면 꿈속에서
열 개의 손톱이 다 부러졌다
손톱에서 진흙 동백이 피었다
종이 인형을 오리는 습관이 생겼다
빨리 죽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했다
인간의 죄는 손에 다 모여 있다
죄가 묻은 동백은 밤에도 검다
이번 생은 내가 만든 산이라
혼자 넘어야 한다
무릎을 안으면 진흙이 묻어 있었다
이제 모든 것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계절
뒤돌아보지 않았다
♧ 소년들
오늘 밤은
다친 감정의 방향이다
그대가 얼굴이 긴 것은
그대 안의 짐승 때문이다
심장 속에 펄럭이는
혁명의 깃발
붉다
누가 검은 짐승을 풀어두고 갔나
그대를
일곱 번 묶겠다
몸 안의 칼을 뽑아
녹슨 짐승의 배를 가르면
아픈 떠돌이별이 뜬다
슬픔은 개인적이라
가끔 투명하다
♧ 소년들의 세계사 2
취한 손으로 천 마리 새를 쓰다듬었다
새를 만지면 온몸이 가려웠다
휘파람을 불면 뱀을 닮은 소녀들이 왔다
우리는 뼈에서 태어났다
1교시가 제일 힘들었다
내 이름을 한자로 쓰면 용서받는 감정이 된다
겨울이었다
애인의 장점을 수첩에 적어보았다
못된 애들은 매력적이다
고백을 하면 내 안의 아버지가 조금씩 녹았다
추운 것을 죄라고 적었다
울고 있을 때 심장이 따뜻해진다
흙으로 이루어진 인간들은 흩어져 번성할 것이며
슬픔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나는 병든 지구에 적합하다
삶이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제 몸속으로 추락하는 것
우리는 사라져서 무섭다
간절기에는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다
2교시는 나무를 버릴 차례다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 (여우난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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