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 고흐
젖은 침대 속으로 뱀들이 지나간다
생레미 정원의 해바라기가
개처럼 짖는다, 새가 외국어로
울고 간다
사물들은 무례하고 심술궂었다
발작을 하면 허파에서
미친 개구리들이 뛰어나온다
팔이 긴 인도원숭이가 창문을 삼킨다
테오에게 편지를 쓸 때
사람의 말을 하는 까마귀가 찾아왔다
고백할 것이 많아 오후가 무서웠다
감정이란 처음부터 상처였다
아몬드 꽃이 피면
젊어서 죽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아침마다 귀가 멀었다
그림자는 소음이다
등 뒤에 개구리들이 우글거렸다
♧ 백 톤의 질문
뒤돌아보면
가을이었다
소주가 달았다
내가 버린 구름들
생강나무 꽃처럼 눈이 매웠다
고백이란
심장 근처에 불이 켜지는 것
그렇게 인간의 저녁이 온다
불탄 씨앗 같은 나를
흙 속에 파묻던 밤
죄 많은 손을 씻으면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두 손
어떤 생(生)은 어떤 눈빛으로
커튼을 닫고 밥을 먹고 비탄을 물리치나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사라지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 파(波)
그리울 테면 그리워보아라
뱀을 죽이면 비가 온다
누군가 나에게
현무와 주작을 아느냐고 말했다
물 수자를 쓰면
해변이 부서진다
저녁의 해변은 남은 사람의 것
나는 물결에 잡힌 사람
아버지 49제 날
나는 손가락을 베었다
붉은 별이 몇 개 떴다
아버지가 핏방울처럼 번져간다
몸에 별을 가두고
입술을 꼭 다물고 느리게 빛났다
아버지는 어디쯤에서 뒤돌아보실까
우리는 정녕 아름다웠던가
물에 발을 담그면
운명이란 바다를 다 가졌다는 것이다
더 춥고 싶었다
그리움은 물결치는 것이므로
♧ 앨리스의 사물들
3분에서 5분 동안 당신은 고장 날 것입니다
썩은 세계는 충분히 아름답지요
커피를 마시면 3분 뒤에 나는 커피 마신 사람이 된다
몸을 기울이면 빈 곳이 생긴다
식은 감정에 물을 주면 얼굴이 고장 났다
헬멧을 쓰면 우주에 온 것 같다
고음으로 노래를 부르면 개인은 비범해진다
일기장에 미친 토끼들이 뛰어온다고 적었다
강물 속에서 누군가 우리를 부르고 있다
어머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오후였다
감정이란 감정 따위를 손톱으로 눌러 죽이는 것
그가 말했을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까
나는 여러 개이므로 여러 번 부끄러워진다
오늘 저녁은 내 얼굴에서 달아날 것이다
이,별에도 봄이 온다라고 누군가 안부 문자를 보내왔다
몸을 기울이면 빈 곳이 생긴다, 손가락이 끈적거렸다
♧ 먼지 인간
나는 늙어졌다 젊어진다
누군가 새벽을 끌고 가고 있다
혼자라는 건
죄가 아니다
내가 나에게 도착했다는 것
누군가 앉았던 자리를 닦으면
먼지가 묻어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먼지의 발로 유랑했다
고통은 왜 고체인가?
입술을 깨물면 아픈 저녁이 탄생한다
눈썹 짙게 그리고
먼지라고 발음하면
새벽의 질문은 거짓말인지 몰라
두 사람이 함께 울면 퇴적된다
누군가 삶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무언가 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세계는 은밀하고 아름다우며
새를 흔들면 지층이 만져졌다
친절한 영혼은 먼지 냄새가 난다
없는 손목이 내 얼굴을 만졌다
자욱하다
나는
나에게 운반되는 중이다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 (여우난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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