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하는 우주
내가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풀었다고
언제나 같은 크기의 보상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주는
환대를 베푼 마음 운동을 잘 기록해 두었다가
언젠가 우리가 낙담하여
흔드리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밤이슬 내려 어깨를 감싸 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밤이슬에 촉촉이 젖은 우리는
활기를 되찾고
새로운 금빛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예고편 – 이수미
처음 본 순간 한눈에 알았다고
순진한 내 마음 방망이로 두들기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벨 소리로 길들여 놓고
빨려드는 눈망울로 너밖에 없다고
붉은 장미처럼 쏟아 놓은 말에 홀딱 빠져
두 눈 질끈 감아버렸는데
살 속 그림자 새기던 뜨거운 몸짓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나는 어쩌라고
거센 파도에 떠밀려 가는 조약돌처럼
홀로 먼길 떠나야 한다니
살아온 날들 헤아려 봐야 예고편에 불과해
난 어쩌라고
♧ 향연 – 허향숙
영정 사진 주위를 맴도는
연기를 보며
향연을 떠올린다
바쁘게 사느라
만나지 못한 사람들
못다 한 이야기 풀어놓는다
울며 웃으며 떠들썩하니
잔칫날 같다
상주석 말미
오순도순 앉아 있는
어린아이 셋
봄나들이 나온 병아리들처럼
엎치락뒤치락 서로 기대 졸고 있다
만면에 도는 미소
눈가엔 채 마르지 않은
눈물 한 방울 맺혀 있고
♧ 인동차 - 정지용
노주인의 장벽에
무시로 인동 삼긴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소리에 잠작 하다.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 바람 우는 밤 – 임승진
검은 비 몰려올 듯
나무가 흔들리며
전깃줄이 신음 소리를 낸다
들판을 구르다
산꼭대기로 솟구쳐
지평선을 달리자니
길이 멀어 울고
갈 길 몰라 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서
뼈가 갈리도록
외로움에 부딪는 소리
보이지 않는 길이 두려워
이 산 저 산 헤매며
돌개바람으로 맴돌다가
입 틀어막고 목울음 참는다
굳게 잠긴 어둠이 풀리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새 아침이 고요해지기를 바라며…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41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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