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5)

김창집 2023. 3. 4. 01:09

 

 

기록하는 우주

 

 

내가 누군가에게 환대를 베풀었다고

 

언제나 같은 크기의 보상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주는

 

환대를 베푼 마음 운동을 잘 기록해 두었다가

 

언젠가 우리가 낙담하여

 

흔드리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밤이슬 내려 어깨를 감싸 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밤이슬에 촉촉이 젖은 우리는

 

활기를 되찾고

 

새로운 금빛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고편 이수미

 

 

처음 본 순간 한눈에 알았다고

순진한 내 마음 방망이로 두들기며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벨 소리로 길들여 놓고

빨려드는 눈망울로 너밖에 없다고

 

붉은 장미처럼 쏟아 놓은 말에 홀딱 빠져

두 눈 질끈 감아버렸는데

 

살 속 그림자 새기던 뜨거운 몸짓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나는 어쩌라고

 

거센 파도에 떠밀려 가는 조약돌처럼

홀로 먼길 떠나야 한다니

 

살아온 날들 헤아려 봐야 예고편에 불과해

난 어쩌라고

 

 

 

향연 허향숙

 

 

영정 사진 주위를 맴도는

연기를 보며

향연을 떠올린다

 

바쁘게 사느라

만나지 못한 사람들

못다 한 이야기 풀어놓는다

울며 웃으며 떠들썩하니

잔칫날 같다

 

상주석 말미

오순도순 앉아 있는

어린아이 셋

봄나들이 나온 병아리들처럼

엎치락뒤치락 서로 기대 졸고 있다

만면에 도는 미소

눈가엔 채 마르지 않은

눈물 한 방울 맺혀 있고

 

 

 

 

인동차 - 정지용

 

 

노주인의 장벽에

무시로 인동 삼긴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소리에 잠작 하다.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바람 우는 밤 임승진

 

 

검은 비 몰려올 듯

나무가 흔들리며

전깃줄이 신음 소리를 낸다

 

들판을 구르다

산꼭대기로 솟구쳐

지평선을 달리자니

길이 멀어 울고

갈 길 몰라 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서

뼈가 갈리도록

외로움에 부딪는 소리

 

보이지 않는 길이 두려워

이 산 저 산 헤매며

돌개바람으로 맴돌다가

입 틀어막고 목울음 참는다

 

굳게 잠긴 어둠이 풀리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새 아침이 고요해지기를 바라며

 

 

                                       *월간 우리2월호(통권41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