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3)

김창집 2023. 3. 3. 01:19

 

 

나비의 밀도

 

 

나비를 펼치면 헛꿈이다

꽃의 고요를 훔친 자

귀인(貴人)은 그렇게 온다

 

돌사자를 어깨에 이고 이마에 두 눈을 그려

가시밭길을 뒹굴고 여린 것을 이끌고 병들고 쇠잔한

늙은이를 부축하고

 

회심곡을 부르면 쟁쟁 바라 소리가 나며 아픈 곳에 물

병을 부어주며

 

돌 속에 두 다리를 묻은 용두관음

두 눈을 부처처럼 내리깔고

돌사자를 타고 불의 필체로 꽃을 채우는

 

나비는 모서리가 많다

나비는 한 번 죽은 마음

 

 

 

 

첫사랑 1

 

 

나는 자주 빛났다

 

내 심장에

이빨 자국이 나 있다

 

벽지 무늬 속에서

검은 짐승들이 뛰쳐나온다

 

커다란 쇠망치를 들고

내 눈 속의 짐승을

차례로 내려쳤다

 

춥고 따스했다

한쪽에 빙하가 가득했다

12마리의 개들이 사시사철 짖었다

 

 

 

 

동백 전언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었다

오후 내내 폭설이었다

집에서 앞 머리카락을 잘랐다

이마의 흉터가 선명했다

 

어릴 적 담장에 핀 동백을 따다

커다란 돌이 내 이마에 떨어졌다

 

흰 눈에 떨어진 선혈이

느리게 꽃을 읽어 내려갔다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다 보였다

나는 꽃의 끝이었다

 

동백을 보면

오줌이 마려웠다

첫 생리를 시작한 날도 동백이 피었다

숲을 더럽히고 싶었다

아플 때마다 꽃이 피었다

 

동백이 피면 꿈속에서

열 개의 손톱이 다 부러졌다

손톱에서 진흙 동백이 피었다

 

종이 인형을 오리는 습관이 생겼다

빨리 죽는 것들에 대하여 오래 생각했다

인간의 죄는 손에 다 모여 있다

죄가 묻은 동백은 밤에도 검다

 

이번 생은 내가 만든 산이라

혼자 넘어야 한다

무릎을 안으면 진흙이 묻어 있었다

 

이제 모든 것들이 흙으로 돌아가는 계절

뒤돌아보지 않았다

 

 

 

 

소년들

 

 

오늘 밤은

다친 감정의 방향이다

 

그대가 얼굴이 긴 것은

그대 안의 짐승 때문이다

 

심장 속에 펄럭이는

혁명의 깃발

붉다

누가 검은 짐승을 풀어두고 갔나

 

그대를

일곱 번 묶겠다

 

몸 안의 칼을 뽑아

녹슨 짐승의 배를 가르면

아픈 떠돌이별이 뜬다

 

슬픔은 개인적이라

가끔 투명하다

 

 

 

 

소년들의 세계사 2

 

 

취한 손으로 천 마리 새를 쓰다듬었다

새를 만지면 온몸이 가려웠다

휘파람을 불면 뱀을 닮은 소녀들이 왔다

우리는 뼈에서 태어났다

1교시가 제일 힘들었다

내 이름을 한자로 쓰면 용서받는 감정이 된다

겨울이었다

애인의 장점을 수첩에 적어보았다

못된 애들은 매력적이다

고백을 하면 내 안의 아버지가 조금씩 녹았다

추운 것을 죄라고 적었다

울고 있을 때 심장이 따뜻해진다

흙으로 이루어진 인간들은 흩어져 번성할 것이며

슬픔은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나는 병든 지구에 적합하다

삶이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제 몸속으로 추락하는 것

우리는 사라져서 무섭다

간절기에는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다

2교시는 나무를 버릴 차례다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여우난골,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