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의 시(4)

김창집 2023. 3. 7. 01:18

 

압화押花

 

 

지금 여기

그대의 꽃자리

 

은하수에 오랜 안부를 전하고

상념의 깊은 골짝 따라

두려움도 접는다

 

올레에서 마주치면

눈빛이라도 주고받자

 

사랑이 없었다면

시들었을 꽃잎 위로

 

살아온 새의 두께만큼

어린 봄 실눈 뜬다

 

 

 

상림의 가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천년이 걸렸구나

 

쭈글쭈글한 발의 행성이

태양계를 벗어나 몇 만 년 후

물기 없는 내 영혼

 

또 다시 상림에 안길 수 있다면

꽃 같은 잎 그리움 잎 같은 꽃 외로움

한 줄기 꽃대 그대 곁에

도토리 한 알 은근한 짝 사랑으로 숨어

 

천년의 가을 묵묵히

이 자리 서서

눈길 한번 받아 볼까

행여 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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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의 가을 : 시가 가곡으로 재탄생함.

(작곡 김은혜, 바리톤 왕광렬, 반주 피아니스트 양수아)

 

 

 

영호남 사돈지간

 

 

은발의 청춘 여든넷, 여든일곱

바다 건너와 제주에서 얼싸안고

 

사둔요, 오메 징하게 반갑소잉

뱅기 타니 요래 가찹당게요

 

만나꼬 자꾸 오라카는지, 인자 이자뿟십니더

 

워따메 사둔도. 아가 맬겁시 불렀것소

 

오랜만에 한라산 마주하며

밀크 셰이크 바나나 셰이크 디카시처럼

사돈지간 살갑게 팔짱을 끼고

 

하하 호호 봉숭아 물들인 손톱 위로

미끄러지며 살포시 첫눈 내린다

 

사둔, 좋은 시상 오래 사쇼잉

 

우예든동 아푸지 말고예 알았능교

   

 

 

동거의 시작

 

 

  동박새도 처음부터 동백꽃에 빌붙어 살지 않았다 꽃은 새를 기다릴 줄 모르기 때문이라, 한랭전선이 불러온 우박과 번개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 동거의 시작이었다

 

  간접조명이 팔짱 끼고 비추고 있는 자리

  여자 대 여자 알몸으로 만난다

  피부를 타고 흘러내린

  크고 작은 비눗방울

  오해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나부랭이들을 감고 하수구로 사라진다

  어디선가 흐느끼며 뒤돌아 울먹이는

 

  마음 뜯는 소리거니 쥐어져 흔들린 것도 쥐고 흔든 것도 아닌

  고약하거나 나쁘거나 피를 말리며 관계를 외면한 세월

  뼈아픈 푸른 밤, 상처의 길은 덧나지 않고

  상생을 위한 동거가 방문을 넘는다

 

 

 

문자 봉오리

 

 

소리 없는 눈짓만으로 주고받은

희고 노란 봉오리 진 얘기들

 

올망졸망 꽃망울들 사이

보고픈 목소리로 피어나고파

청아하고 탐스럽게 영근

결 고운 말의 씨앗이 되어

 

산새소리, 냇물소리, 댓바람소리로

가득 채우고 올 거야

귀한 그대의 하루가

정다운 미소로 번져나기를

 

 

         *장한라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도서출판 상상인,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