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5)

김창집 2023. 3. 9. 00:01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아픈 쪽부터 어른이 됩니다

 

고통에는 모두 주인이 있습니다

피가 되는 것들은 아늑합니다

 

나는 타악입니다

부딪혀서 아름답습니다

고통을 노래하는 방식입니다

 

소리는 대지의 끝으로 번져갑니다

소리의 표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건반을 누르면 피로 다녀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맨발로 물가를 걸으면 알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안녕 손을 흔들며

흘러가는 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봅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나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어서 나는 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요

 

피아노는 저 많은 곡조를 다 껴안으려

다리만 남았습니다

 

바람 불면 나는 미와 레 사이에 있습니다

반음으로 찾아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썩는 것들과 흩어지는 것들의 계명을 생각합니다

나이면서 너인

반음의 계절

 

나는 낮은 도쯤에서 희미하게 서러워질 것입니다.

 

 

 

도서관 활용법

 

 

가능하면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책의 밖입니다

 

책장에서 죽은 나방을 보았습니다

도서관이 가벼워졌습니다

 

귀퉁이를 접으면 자국이 남습니다

백 년 전에 두고 온 감정이 접혀있습니다

죽음을 접을 수 있다면

당신은 죽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눈빛으로 영국에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한참 읽어도 확신이 없습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분류됩니다

포유류입니다 명사입니다

안녕 하는 두 개의 흰 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은 쉽게 나누어집니다

 

서가는 뱀눈처럼 아름답습니다

책을 읽으면 아홉 개의 기분이 됩니다

 

내가 슬픔이라 말하면

슬픈 것이 되는 것

그런 것

 

두 개의 흰 손으로

깊어지는 것

 

 

 

사과

 

 

감정은

입구가 좁고 가늘었다

 

과실주를 흔들면

나는

색이 흩어지는 사람

잠시 붉어진 얼굴이 다녀갔다

 

사과에서 사과를 빼앗고

빨강에서 빨강을 빼앗고

사과는 쉽게 죽지 않으며

흙과 물의 계절로 돌아간다

 

어릴 적 욕조애서 숨을 참으면

아픈 얼굴이 보였다

사과처럼 붉었다

병 속엔 폭설의 들판이 가끔 잠긴다

낡은 외투를 걸치고

병든 들판을 다녀가는 사람

 

나는 당신의 고통에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는지

입에 신맛이 고이던

검은 늪이 깊어지던

 

병과 함께 다정해지는

위악의 계절

 

오늘 밤은 사과가 깊다

 

 

 

깊어지는 사과

 

 

사과가 익는 저녁은 수상하다

 

익는다는 말은

사과의 의지

사과나무를 떠나겠다는

사과의 표정

 

사과를 깎으면

나무의 첫 마음 소리가 난다

 

파리넬리의 울게 하소서를 듣는 오후

떠나는 것들은 왜 모두 손목이 젖어 있을까

남근을 자르고

신의 목소리로 노래한 자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으로 돌아갔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나무를 버린 꽃의 손목이 있다

두 귀에 푸른 뱀을 걸고

안녕

머리카락을 뽑고 캄캄해진다

 

잘 익은 사과를 먹으면

첫 생각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나는 뱀을 삼키고 태어났으므로

어머니를 삼키고 태어났으므로

 

 

 

애월 34

 

 

  흙에 물을 개면 불타는 진흙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은 여러 번 읽어도 낡지 않는다 황금빛 밤의 끝에서 멈춘다 뒤돌아보면 나를 따라온 병든 사내가 이끼처럼 물가에 앉아 있다

 

  모래를 파면 누군가 버리고 간 녹슨 얼굴

  당신이 가짜라면 당신을 베어버리겠다

 

  얼굴 흰 관음보살의 꿈을 꾸었다 관음은 먼 길을 다친 개처럼 걸었을 것이다 얼굴을 만나면 얼굴을 지웠다 얼굴에 새겨진 흙의 각인을 지웠다 이번 생은 쓸모없어 아름답고 현묘하다

 

  애월 하고 부르면 칼날 같은 짐승 몇 마리 걸어 나온다 아픈 것은 기도가 되지 못한다 피는 틀린 적이 없다

 

  새와 첫눈으로 부딪치는 애월 일기는 늘 수치심으로 가득하다 혼자여도 좋다 나는

 

 

 

                   *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여우난골,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