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아픈 쪽부터 어른이 됩니다
고통에는 모두 주인이 있습니다
피가 되는 것들은 아늑합니다
나는 타악입니다
부딪혀서 아름답습니다
고통을 노래하는 방식입니다
소리는 대지의 끝으로 번져갑니다
소리의 표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건반을 누르면 피로 다녀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맨발로 물가를 걸으면 알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안녕 손을 흔들며
흘러가는 것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봅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나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어서 나는 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요
피아노는 저 많은 곡조를 다 껴안으려
다리만 남았습니다
바람 불면 나는 미와 레 사이에 있습니다
반음으로 찾아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썩는 것들과 흩어지는 것들의 계명을 생각합니다
나이면서 너인
반음의 계절
나는 낮은 도쯤에서 희미하게 서러워질 것입니다.
♧ 도서관 활용법
가능하면 고요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책의 밖입니다
책장에서 죽은 나방을 보았습니다
도서관이 가벼워졌습니다
귀퉁이를 접으면 자국이 남습니다
백 년 전에 두고 온 감정이 접혀있습니다
죽음을 접을 수 있다면
당신은 죽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눈빛으로 영국에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질문은 한참 읽어도 확신이 없습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분류됩니다
포유류입니다 명사입니다
안녕 하는 두 개의 흰 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은 쉽게 나누어집니다
서가는 뱀눈처럼 아름답습니다
책을 읽으면 아홉 개의 기분이 됩니다
내가 슬픔이라 말하면
슬픈 것이 되는 것
그런 것
두 개의 흰 손으로
깊어지는 것
♧ 사과
감정은
입구가 좁고 가늘었다
과실주를 흔들면
나는
색이 흩어지는 사람
잠시 붉어진 얼굴이 다녀갔다
사과에서 사과를 빼앗고
빨강에서 빨강을 빼앗고
사과는 쉽게 죽지 않으며
흙과 물의 계절로 돌아간다
어릴 적 욕조애서 숨을 참으면
아픈 얼굴이 보였다
사과처럼 붉었다
병 속엔 폭설의 들판이 가끔 잠긴다
낡은 외투를 걸치고
병든 들판을 다녀가는 사람
나는 당신의 고통에
얼마만큼 다가갈 수 있는지
입에 신맛이 고이던
검은 늪이 깊어지던
병과 함께 다정해지는
위악의 계절
오늘 밤은 사과가 깊다
♧ 깊어지는 사과
사과가 익는 저녁은 수상하다
익는다는 말은
사과의 의지
사과나무를 떠나겠다는
사과의 표정
사과를 깎으면
나무의 첫 마음 소리가 난다
파리넬리의 울게 하소서를 듣는 오후
떠나는 것들은 왜 모두 손목이 젖어 있을까
남근을 자르고
신의 목소리로 노래한 자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으로 돌아갔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면
나무를 버린 꽃의 손목이 있다
두 귀에 푸른 뱀을 걸고
안녕
머리카락을 뽑고 캄캄해진다
잘 익은 사과를 먹으면
첫 생각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나는 뱀을 삼키고 태어났으므로
어머니를 삼키고 태어났으므로
♧ 애월 34
흙에 물을 개면 불타는 진흙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은 여러 번 읽어도 낡지 않는다 황금빛 밤의 끝에서 멈춘다 뒤돌아보면 나를 따라온 병든 사내가 이끼처럼 물가에 앉아 있다
모래를 파면 누군가 버리고 간 녹슨 얼굴
당신이 가짜라면 당신을 베어버리겠다
얼굴 흰 관음보살의 꿈을 꾸었다 관음은 먼 길을 다친 개처럼 걸었을 것이다 얼굴을 만나면 얼굴을 지웠다 얼굴에 새겨진 흙의 각인을 지웠다 이번 생은 쓸모없어 아름답고 현묘하다
애월 하고 부르면 칼날 같은 짐승 몇 마리 걸어 나온다 아픈 것은 기도가 되지 못한다 피는 틀린 적이 없다
새와 첫눈으로 부딪치는 애월 일기는 늘 수치심으로 가득하다 혼자여도 좋다 나는
*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 (여우난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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