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의 귀 – 정순영
나무는 가지마다 귀가 있다
가지가 많은 나무일수록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깊은 계곡의 옹달샘에 숨어서 반짝거리는 윤슬의 빛살소리에서부터
유유히 흐르는 강의 깊은 숨소리와 쓸쓸한 들판 한 가장자리에 홀로 피어 흔들리는 풀꽃의 가녀린 목소리와 황량한 도회 길거리 진눈깨비 속에서 종이를 주워 모은 돈주머니를 ‘나보다 더 가난한 이웃에게 주라’는 꼬부랑 할머니의 마음 소리까지 소중한 소리는 낱낱이 들어서 생명책에 기록한다
♧ 가장 큰 죄 – 김동호
계절 바뀔 때마다
내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한소리가 있다
“어김없이
또 보내주시는
이 새 아름다움,
이것 모르는 죄보다
큰 죄가 있을까”
♧ 눈의 성 – 이상호
눈앞에 버티고 있는 주인은 당신인가요
쌓인 눈을 밟다가 가까이서 마주 선
불빛만 거울 같은 곳, 창가에 아롱이는 꽃
풍문처럼 울렁이는 소묘로 다가서면
집시들의 자장가가 희끗하게 달려와서
방마다 당신의 숨결처럼 잠겼다가 달아나는 곳
파묵의 소설 같은 하얀 성이 떠오르지요
뚜벅뚜벅 걸어서 따라가고 싶을 만큼
조촐한 시야 밖으로 가루 눈발이 쌓이는 곳
♧ 그리움 – 유정자
누군가 내게 그리움의 빛깔을 묻거든
저 하얗게 흩어지는 눈송이처럼
잠시 바람 속을 스치다 스러지는 은빛 섬광 같은
그 찰나의 빛깔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평생 유리알 같던 엄마의 의식에도
먹구름 끼어 혼돈의 고갯길을 넘으실 때
찰나의 눈빛으로 전해 주신 그 맑고 깊은 사랑
그 찰나의 순간 속에서 내 볼을 쓰다듬고 다시금
깊은 잠에 빠지셨던 엄마
휠체어를 밀던 병원 복도
의식 없던 엄마의 초인적 힘이 빚어낸
은빛 섬광,
수많은 언어가 함축된 그 빛깔이 바로 오로지 나만이 알 수 있는
그리움의 빛깔이라고 말하고 싶다.
♧ 모든 시 – 김종욱
별로 태어나고
꽃으로 빛나고
모든 생명으로 피어나다
사람으로 시들어갔다
* 월간 『우리詩』 2023년 3월호(통권41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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