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6)

김창집 2023. 3. 16. 01:06

 

 

애월 1

 

 

아버지 돌아가시고

넓은 집에

혼자 남은 어머니와

늙은 딸이

찬밥에 물을 말아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정원 잔디밭에

잡풀이 귀신처럼

달려와 자라고

 

어머니는

오래된 집처럼

천천히

눈과 귀가 멀어간다

 

어디선가

야생 곰취 냄새가 난다

안방 낡은

화장대 위에

 

폐가 아픈

나무 원앙

 

피가 돌아

교교교교 운다

 

 

 

 

애월 2

 

 

내 늑골에 사는 머리 검은 짐승을 버렸다

애월이라 부르면 밤에 갇힌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맨발로 돌 속의 꽃을 꺾었다

흰 소와 만근의 나무 물고기가 따라왔다

 

백사장에 얼굴을 그리면

물로 쓰는 전언은

천 개의 밤을 끌고 온다

귀에서 천둥이 쏟아진다

 

시집에 끼워둔 애월은 눈이 검다

수평선에서 밤까지 밑줄을 그어본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검정은 어디쯤에서 상심을 찢고 태어나나

나는 밤을 오해한다

 

나는 오늘부터 저녁이다

 

 

 

 

애월 24

 

 

당신이 가장 아름다울 때

달이 뜬다, 애월에선

물이 깊어 떠난 마음을 잡아당길 수도 있겠다

 

밥 먹으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죽어가는 개의 눈빛

덜 마른 빨래

해변을 걸으면 누군가 두고 간

사랑이 식은 발자국들

 

달 속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불빛 몇 개 거느려

들개처럼 휘돌아다니리

 

새벽 비가

파도에 쓸려 온 물고기 뼈를

조금씩 부수고 있다

찬술 석 잔에 소년들은

지혜로운 노인으로 늙어간다

소년들아 빨리 자라지 않아도 좋다

 

감은 눈을 다시 감으면

나와 너를 겹치면

서로 병든 얼굴을 꺼내는

포란의 계절이었다

 

꿈에서 흰 뼛조각 같은

어린아이의 썩은 이빨을 보았다

헌것은 가고 새것은 돌아오라

삼승할망 어른이 살오를 꽃을 들고

내 어깨를 세 번 내리쳤다

 

()이었다

 

 

 

 

애월 29

 

 

죽간을 쓰고 진흙으로 봉하는 밤이면

애월로 애월로 돌아오는 파도들

쓸모없는 노력들

붙잡을 수 없는 것들

피 묻은 눈과 코를 들고

어두워지는 저 바다는

애초에 이름이 없었다

 

물양귀비는 해마다 꽃을 피우고

새 피가 돈다

한밤에 천 리를 가는 등대 불빛은 고요에 가깝다

검은 먹으로 둥글게 휘어지는

애월이라는 필체

 

저 파도 속을 달려가는

만 마리의 말들은 언제 다 썩을 것인가

무량한 달빛은 언제 사람으로 우뚝 일어서는가

절벽에서 창백한 손과 발바닥으로

일어서는 진흙 사람들

터진 눈으로 고요에서 얼마나 달아났느냐

 

사람의 형상으로 동물의 형상으로

흐려지는 영혼

나의 하루는 지상의 겨울보다 쉽게 저물어

달빛이 아팠다

내 탓이 아니었다

 

 

 

애월 30

 

 

  돌 속에 종일 누워 있었다 돌 속으로 늦은 서설이 내린다 지친 어깨와 맨발로 기어가 녹슨 짐승이 되리 누군가 흐린 발소리로 돌 속을 걷고 있다

 

  어제는 다리를 다친 노루가 돌 속으로 걸어 들어와 편백나무 아래서 상처를 핥았다 눈밭에 남은 짐승의 상처 쪽으로 이계(異系)의 저녁이 몰려왔다 노루가 끌고 온 저녁 잔별들이 귤꽃처럼 흔들린다

 

  흰 얼굴로 돌 속에 앉아 돌해금을 켠다 해금이 노루 소리로 운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그림자가 부풀었다 검은 감정으로 나아가는 애월 피도 없이 살이 오르는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여우난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