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의 시(5)

김창집 2023. 3. 20. 00:19

 

 

슬픔의 좌표

 

 

압정처럼 박힌

흰 꽃

 

물소리가 난다

뼈가 다 보인다. 끝에

독이 묻어 있다

 

올 여름

다시 피었다

번쩍이는 발목을 들고

 

쇠칼로 베어내도

칼 속에서

번쩍거리는

흰 꽃

 

 

 

웃는 돼지

  

 

죽음이 웃는다

 

돼지는 죽으려고 태어난다

웃는 돼지머리가 더 비싸다

 

귀를 베어 먹어도 웃는다

코를 먹어도 웃는다

272kcal로 웃는다

 

사람의 입속에서 웃는다

창자 속에서 웃는다

똥 속에서 웃는다

흙속에서 웃는다

돼지 속에서 웃는다

사라진 몸뚱이들이 몰려와 웃는다

물컹거리며 웃는다

 

돼지는 식물성이다

웃으면 귀가 풀잎처럼 자란다

평생 비굴함을 다 받아냈을 귀

치욕을 받들었을 머리

뼈도 아니고 살도 아니다

치욕을 구부려 웃는다

펄펄 끓으며 웃는다

식칼처럼 웃는다

 

 

 

침대 시위

    -Bed-in For Peace

 

 

나는 좋다

존 레넌과

오노 요코가

침대에 앉아있는 사진이

 

1969325

미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려고 했을 때

비틀즈는 영국 정부에 훈장을 반납했다

 

존 레넌과 요꼬는

암스테르담 힐튼호텔 침대에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 시위를 했다

신혼여행 중이었다

 

기자들의 날카로운 펜촉도

피스톨처럼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도

침대의 깨끗한 햇볕과

평화를 지울 수는 없었다

 

평화란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세 끼를 느리게 먹는 것

 

 

 

오후의 사물 연습

 

 

나는 루저입니다

있지만 없습니다

나의 뒤편은 사물입니다

사물과 자주 부딪칩니다

뒤로 걸으면 사물은 더 닫힙니다

 

*

 

개처럼 계속 짖기

돌멩이처럼 계속 멈춰있기

 

*

 

눈을 감으면 나는 계속 인형입니다

 

*

 

사람과 부딪혀 외부가 생깁니다

오후의 사물 연습은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물은 도착하지 못하는 여행입니다

 

*

 

지구를 끌고 다닌 적이 있지요

설탕을 먹으면 보라색을 칠하고 싶었지요

걸을수록 가난해졌고

만날수록 절실합니다

 

*

 

나는 가끔 뭉클합니다

종이 코끼리처럼 버려집니다

반성문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

 

나는 나를 떠날 겁니다

감기약처럼 혼몽하게 도시를 떠돕니다

버려진 화단에

고요하게 사물처럼 앉아 있기도 합니다

 

*

 

사물은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을 내밀지 않습니다

신의 영역이 아닙니다

이미 신입니다

당신과 나의 침묵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사물은 쉽게 썩지 않으며

쉽게 죽지 않으며

쉽게 분노하지 않으며

아랫도리로 아이를 낳지 않으며

성기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열면 열리고

닫으면 닫히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며

 

 

 

 

통조림

 

 

당신은 사천왕입니다

당신은 서서 죽은 자입니다

스스로 머리를 죽여 불멸을 얻은 자입니다

 

당신의 고백은 상했습니까

고백은 가격으로 책정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비었습니까

가득 찼습니까

가득 차서 문제입니까

 

당신은 죽은 것들의 목록입니까

당신 속에서

당신이 계속 죽는 계절입니까

 

책 속에서 죽은 나무가 계속 죽습니다

죽은 물고기 속에서 죽은 물고기가 다시 죽습니다

당신은 죽은 나무와 죽은 물고기와

죽은 과일들의 증거입니까

 

그래서 당신은 감정입니까

관리 대상입니까

 

당신을 열면

당신은 왜 미끄럽고 냄새가 납니까

깁니다 으깨어집니다 넓습니다 땅속입니다 물속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머리를 먹어치우고

되돌아오는 기술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맞습니까

 

진공은 얼마나 아름다운 적멸입니까

 

 

                                *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여우난골, 202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