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4시까지 나는
갈비뼈가 아프면 자랑스러워
혀를 깨물면 열쇠가 들어있어
먼지란 발음이 가장 아름다웠어
심야의 편의점에서 만난 여자애가
말할 때마다 담배 냄새가 났어
적은 용서받기 위해 태어나고
삶이 그대를 속인다면 속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고체들은 외롭지
목포에서 한 달만 살까
대학 동창들은 부지런하고
책을 들고 다니면
난 무언가 될 수 있을까
앞머리를 길게 기를 거야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아
새벽 4시까지 나는 비물질이야
우리는 다시 발생할 거야
♧ 궁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고 싶지도 않았다
국민교육헌장을 외던 국민학교는 국민만 남아 있었다
개근상을 받기 위하여
국민이 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항목을 암기해야 했다
학교 운동장의 돌을 골라내고 잔디밭을 가꿨으며
폐휴지를 가져갔으며 운동장에 모여 국민체조를 했으며
배고픈 궁민窮民으로 탄생했다
노력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우리는 윤리적인 동물로 퇴화했고
가난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윤리나 도덕을 몰라도 꽃들은 절기에 맞춰 피었고
금요일엔 게으르고 싶었지만 그것도 죄가 되었다
오랫동안 장기 집권했던 대통령의 죽음과
군인들이 나라를 찬탈하고 계엄령과 혁명과 청춘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약한 것들은 다쳤고 강한 것들은 더욱 강해졌다
법을 준수하고 규칙을 열심히 따랐으며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자기 계발에 힘썼으며
돈을 쪼개어 저축했고 잠을 줄이며 헝그리 정신으로
확실한 궁민이 되었다
자기 계발과 개발을 왜 해야 하는 거지
국민교육헌장은 가짜다
나는 다시 궁민교육헌장이라고 고쳐 쓴다
우리는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며
멈추지도 않을 것이며
쓸모없는 무언가를 할 것이며
느리게 느리게 아름다워질 것이며
자구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 생각하는 사물들
피아노가 부서졌다
미처 부르지 못한 노래가 쏟아졌다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이름에서 달려나왔다
피아노는 피아노를 끊었다
도를 누르면 나무와 바람소리가 났다
실패한 건반은 다정하다
학생들은 노래하고
선생님은 고장 난 피아노로 노래를 가르쳤다
교칙은 악보처럼 단단했다
성대를 수술한 애완견의 침묵처럼
음악실은 추웠다
아이들은
망가진 피아노 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입을 맞추곤 했다
피아노를 열면
썩은 알집에서
거미 새끼들이 까맣게 흩어졌다
실패한 건반은 다정하다
♧ 아를에서의 일기
그는 눈으로도 훔칠 수 없는
별을 두 점 그렸다
귀에서 강물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세상에 무서운 질문을 던지는가
기적이란 무엇인가
죽은 나무를 어떻게 흔들어 깨울 것인가
이번 생은 죽기보다 살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나는 허구다
실패란 어떤 색깔인가
고독이 가짜라면
고통이 고통을 구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결심이다
별은 훔쳐도
별은 빛난다
강물 속에서 누군가 없는 얼굴을 내민다
무엇인가 막 완성된다
♧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두 손을 씻으면
위로할 수 없는 손이 자란다
고통은 유일하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젖은 배를 끌고 황금의 도시로 가는 자들아
나의 인간과 당신의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울면 지는 것이다
홀로 남겨진 것은 우리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물속은 폭풍우와 풍랑이다
소년과 소녀는 물의 안쪽 높은 곳에서
비루한 지상을 위로한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인간은 인간을 용서하려는 방식이다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물에 찔리고 물에 부딪히고 물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소년과 소녀들, 나는 한 잔의 물을 마신다
물에 젖은 눈과 손과 청춘을
물에 젖은 눈과 손과 청춘으로 닦아주마
나는 물을 이렇게 고쳐 쓴다
바다나 읽는 나는 무력한 배경이다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견고한 악몽이다
* 서안나 시집 『새를 심었습니다』 (여우난골, 202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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