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산림문학' 2023년 봄호의 시(1)

김창집 2023. 3. 23. 00:17

 

[산림문학이 만난 문인]

 

 

 

내가 처음 감성의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너의 뿌리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음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어머니 치맛자락으로 출렁이며

어린 시야의 절반을 차지했던 너

돌아서면 아득히 멀어지고

품안에 들어서면 정중한 너그러움에

가슴 설레던 기억들

그곳은 시퍼런 동경의 비다였다

 

오직 구름과 말할 뿐

바람만이 들을까 태초의 소리를

산이 바다에서 왔음을 안 이후

나는 인생의 절반을 너에게 걸었다

 

 

 

 

배롱꽃 여인

 

 

자박자박 강물을 주름질 하던 그녀가

배롱꽃 닮았다는 걸 알고 나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네

연신 붉은 시어를 내뿜는 그녀가

배롱나무와 한 통속인 줄 알았다면

간지럼으로 날 흔들 줄 알았다면

문고리라도 걸어 두었을 텐데

병산에 노을이 오기도 전에

만대루 앞뜰마저 붉게 물들었네

지던 꽃이 또 지고 있는 한낮

갈바람이 햇살 기우는 낙강을 향해

이미 재가 된 언어들을 데리고 가는데

괜한 가슴만 쿵쿵했던 붉은 하루

백 일간 더 달려야 할 내 심장 힘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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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며 꽃이 백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으로 부르기도 함.

 

 

 

 

꽃을 안다

 

 

꿈꾸던 사랑은 쉬이 오지 않았다

아침 여명으로 찾아 들거나

바람에 실려 향기로 오거나

비오는 저녁 안개로 피어날까

그리움이 때론 달콤한 설렘이지만

속절없는 기다림은 이제 끝내야지

작은 꽃 한 송이 품은 채

노을이 새벽을 꿈꾸는 강변을 나선다

! 나의 존재를 지우는 꽃이여 전부여

순수한 여백에 꿈을 그리며

행복한 동행을 시작하는 데

자꾸만 물결에 흔들리는 마음

강물이 그녀의 눈물 같아서

행여 이별이 시작될까 봐

얼른 꽃을 안고 돌아선다

 

 

 

 

반딧불이 수레를 타다

 

 

불빛 한 점 없는 그믐밤

수하계곡*에 들어가서

반딧불이 수레를 탔다

형광아래에 마음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더니

우우하며 물에 젖은 솔숲소리가 들리고

품안으로 구슬들이 퐁퐁 쏟아져 내렸다

잊었던 어린 날의 착한 언어들이다

나이 든 소년에게는 큰 선물이다

수하계곡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른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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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계곡 :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 위치한 계곡.

 

 

 

시인과 사유思惟

 

 

어느 술집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시인의 가슴을 가득히 채우고는

스스로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그 것은 분명 자유였다

간섭받지 않는 사유였다

순간, 고여서 썩어가던 시인의 영혼이

서서히 정화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수도는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슬슬 잘도 넘어가는 술로

자유를 마시는 시인을 보고

흐르는 물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생각은 돈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리고도 못 본체 한

술집주인의 기막힌 혜안 때문이었다.

 

 

                      *계간 산림문학2023년 봄(통권 4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