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림문학이 만난 문인]
♧ 산
내가 처음 감성의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너의 뿌리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음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어머니 치맛자락으로 출렁이며
어린 시야의 절반을 차지했던 너
돌아서면 아득히 멀어지고
품안에 들어서면 정중한 너그러움에
가슴 설레던 기억들
그곳은 시퍼런 동경의 비다였다
오직 구름과 말할 뿐
바람만이 들을까 태초의 소리를
산이 바다에서 왔음을 안 이후
나는 인생의 절반을 너에게 걸었다
♧ 배롱꽃 여인
자박자박 강물을 주름질 하던 그녀가
배롱꽃 닮았다는 걸 알고 나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네
연신 붉은 시어를 내뿜는 그녀가
배롱나무와 한 통속인 줄 알았다면
간지럼으로 날 흔들 줄 알았다면
문고리라도 걸어 두었을 텐데
병산에 노을이 오기도 전에
만대루 앞뜰마저 붉게 물들었네
지던 꽃이 또 지고 있는 한낮
갈바람이 햇살 기우는 낙강을 향해
이미 재가 된 언어들을 데리고 가는데
괜한 가슴만 쿵쿵했던 붉은 하루
백 일간 더 달려야 할 내 심장 힘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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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며 꽃이 백일 동안 핀다고 해서 ‘백일홍’으로 부르기도 함.
♧ 꽃을 안다
꿈꾸던 사랑은 쉬이 오지 않았다
아침 여명으로 찾아 들거나
바람에 실려 향기로 오거나
비오는 저녁 안개로 피어날까
그리움이 때론 달콤한 설렘이지만
속절없는 기다림은 이제 끝내야지
작은 꽃 한 송이 품은 채
노을이 새벽을 꿈꾸는 강변을 나선다
오! 나의 존재를 지우는 꽃이여 전부여
순수한 여백에 꿈을 그리며
행복한 동행을 시작하는 데
자꾸만 물결에 흔들리는 마음
강물이 그녀의 눈물 같아서
행여 이별이 시작될까 봐
얼른 꽃을 안고 돌아선다
♧ 반딧불이 수레를 타다
불빛 한 점 없는 그믐밤
수하계곡*에 들어가서
반딧불이 수레를 탔다
형광아래에 마음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더니
우우하며 물에 젖은 솔숲소리가 들리고
품안으로 구슬들이 퐁퐁 쏟아져 내렸다
잊었던 어린 날의 착한 언어들이다
나이 든 소년에게는 큰 선물이다
수하계곡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른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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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하계곡 :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 위치한 계곡.
♧ 시인과 사유思惟
어느 술집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시인의 가슴을 가득히 채우고는
스스로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었다
그 것은 분명 자유였다
간섭받지 않는 사유였다
순간, 고여서 썩어가던 시인의 영혼이
서서히 정화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수도는 고장 난 것이 아니라
슬슬 잘도 넘어가는 술로
자유를 마시는 시인을 보고
흐르는 물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생각은 돈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리고도 못 본체 한
술집주인의 기막힌 혜안 때문이었다.
*계간 『산림문학』 2023년 봄(통권 4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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