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로
대문을 나서는데
반짝
눈길을 붙잡는다
흙이라곤 한 줌도 보이지 않는
시멘트와 시멘트 사이
어떻게 비집고 들어왔을까
민들레 한 송이
빙그레 웃고 있다
흙 한 줌 없는
그곳
그 좁은
사이를
♧ 감사한 하루
비행장 철조망 따라
철길 같은 데크길 걷는다
망루 바라보며 살랑대는 들꽃들과
눈인사하며
실루엣 같은 바람 슬며시
스쳐 지나가는 길에
포로롱 참새 한 마리
철조망 사이를 날아간다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연들
구름 따라 흩어지는 시간
큰 바위 얼굴 같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절로 감사하고 싶은 하루가
지나간다
♧ 노란 엽서
도서관 창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
밤새 도착한 노란 엽서들
어디서 날아온 사연들인지
눈이 부시다
오가는 사람 뜸해
아직 배달되지 못한
샛노란 엽서들
오늘은
새들이 먼저 읽고 날아간다
주인을 기다리는 주차된 자동차 위에도
노란 엽서 한 장 도착하였다
도서관 창가에서 걸어 나온
은행나무 한 그루
오가는 사람 뜸한 뒷골목에서
지친 행인이 어깨 위로
위로의 말 건네려 한다
♧ 연두이고 싶어
동네 한 바퀴
산책길에 들어서면
울타리마다 연둣빛으로
유들유들
봄 햇살이 속닥속닥
게으른 길고양이도
돌담 위로 슬쩍 올라와
연두를 탐내요
쫑긋쫑긋 입을 다시며
줄다리기하듯
햇볕을 잡아당겨요
나도 시린 몸을 꺼내
어린 감잎 속으로
유들유들
살얼음 녹여요
♧ 봄을 기다리며
앞집 돌담에
무성했던 담쟁이
맥없이 말라가고 있다
여름 한낮
싱싱하게 뻗쳐오르던 힘
벽을 기어오르며
지붕을 넘보다 그만
밑동이 잘렸다
파란 손의 욕망
누렇게 오그라들어
바람에 바삭하다
창문 너머
눈 뜨면 매일 마주 보던
싱싱한 푸르름
하루아침에 사라져
삭막한 달밤
재잘재잘
밑동에 새봄 기다리는
아이들 웃음소리
그립다
*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 (한그루, 2023)에서
* 사진 : 요즘 한창인 이팝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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