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꽃 - 임미리
천지에 바람 소리 가득한 날
꽃잎, 소식 한 줄 전하네요.
바람 불어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부드러운 꽃잎 사이로
한 움큼의 향기 붉어져
그대에게 살며시 스며드네요.
나를 바람꽃이라 불러주세요.
세월 흘러도 잊지 않을 향기처럼
꽃의 화신으로 남을게요.
그대에게 영원히 머물 수 있기를
세상에 흔들려 형체를 잃어버려도
온몸으로 그대 감싸 안으며
천년인 듯 향기롭게 피어나기를
바람이 불러주는 노랫소리
천지가 온통 바람꽃이네요.
♧ 인디언 질경이 – 장문석
질기고 독하다는 말,
빈말이라도 하지 마세요
당신들이 우리 땅 빼앗았잖아요
짓밟고 또 짓밟았잖아요
수수만년 사원이자 신전이었던
숲, 그 영험에 불을 지르고
사냥하듯 총질까지 했잖아요
숲의 정령들이 구천을 떠돌고
별들의 춤사위가 고꾸라졌어요
그 주검에, 그 죽음의 터에
당신들은, 당신들의 집을 지었잖아요
은혜는 바라지도 않아요
원주민이라는 말,
연민인 척하지 마세요
물려받은 혈통은 눈물이라서
좁은 틈새일망정 날선 뿌리를 내리고
일단은,
악착같이 버티는 것뿐이에요
♧ 손에 손잡고 – 나병춘
손과 손 인간의 말, 눈과 눈 나무의 말
꽃과 나비 사랑의 춤, 손과 발 우주의 몸짓
머리도
허리 다리도
모두 다 혼불이 되어
♧ 쫄지 마 괜찮아 – 정성수
사는 일이 팍팍하다고
사랑이 힘들게 한다고
투덜대지 마
스쳐 가는 것은 바람이야
흘러가는 것 또한 강물이지
한 번 왔다가 홀로 가는 것
그게 인생이잖아
낯선 사람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도
눈을 깔고 바라봐도
길을 가다가 무릎을 꿇어도
쫄지 마 괜찮아
너는 할 수 있어 뭐든지
잘 할 수 있어
상처도 꽃잎이야
♧ 거미집 – 임영희
전 재산이 오두막 한 채뿐인데
손바닥만 한 마당 곳곳에
정교한 그물 집을 지어놓고
제 땅이라고 박박 우기고 있다
뚝딱
허공에 집 한 채 지어 놓고
갑옷으로 무장한 병정들의 경비가
24시 내내 물샐틈없이 삼엄하다
날마다 새로 짓고
때려 부수고
총성 없는 이 지루한 전쟁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 월간 『우리詩』 5월호(통권 419호)에서
* 사진 : 요즘 한창 피어나는 남방바람꽃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의 시(5) (1) | 2023.05.14 |
---|---|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의 시(1) (1) | 2023.05.12 |
계간 '제주작가' 2023 봄호의 시조(2) (0) | 2023.05.10 |
김순선 시집 '사람 냄새 그리워'의 시(4) (0) | 2023.05.09 |
계간 '제주작가' 2023년 봄호의 시조(1) (0) | 2023.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