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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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의 시(1)

김창집 2023. 5. 12. 07:35

 

 

시인의 말

 

 

귀울림이 심한 날

용수리를 발음해본다

부딪히는 어머니 말, 자나미로 밀려오면

곱숨비질 건너에서

호오이 소리가 매조제기에 떠돈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바다 너머 풍경은 그렇게 모두 되돌아온다

어두운 생() 환히 밝힌

어머니를 통해서

 

 

                                              20235

                                                     김신자

 

 

 

 

풀바른 구덕*

 

 

일생이 마디라서 부러질 줄 몰랐네

빳빳이 풀 먹이고 단정히 펴 바르면

두어 평 남루한 마루 알록달록 환했네

 

천조각 뜯어내어 상처들 덮은 무늬

상웨떡 담긴 모습이 꿈처럼 번지는 건

자식들 뒷바라지한 어머니 흔적이네

 

몇 번을 덧바르면 가난도 말라붙고

쥐오줌빛 얼룩들이 서성대다 멈출 때

무뚱에 졸음 한 짐을 들고 오던 겨울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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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바른 구덕 : 대바구니가 헐어서 종이나 헝겊 따위에 풀을 발라 붙인 바구니. 옛날 제주 사람들의 절약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살에 핀 꽃

 

 

일찍이 어머니가 헛물*에 날 데려간 건

잔잔한 푸른 바다 보라는 게 아니었다

허탕 친 물질이어도 꽃 핀다 이거였다

 

가난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물숨의 기억들이 까치발로 서성이고

달그락 수저 놓는 소리 허공을 내려온다

 

물굿소리 스며든 가까운 얕은 물창

어머니 살꽃** 보다 놀란 그 눈알고둥

둥글고 모진 가난을 몇 바퀴나 굴렸을까

 

이런 삶 기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일찍이 어머니가 헛물에 날 데려간 건

싸락눈 쏟아지는 날 살꽃을 보라 이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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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물 : 해녀들이 막연히 소라, 전복 등을 캐는 작업. 우뭇가사리라든가 톳 따위의 특정 해조류를 일정 기간에 때맞추어 캐는 경우와는 달리 그 소득이 보장되지 않고 헛될 수도 있으므로 헛물이라 한다.

** 살꽃 : 해녀들이 바다에서 나와 추운데 불을 쬐다 보면 온몸에는 울긋불긋 붉은 기미가 잔뜩 끼고, 핏줄이 일어나는 것을 살에 꽃 피었다고 말한다.

 

 

 

 

벳바른 궤에 백서향 피어난다

 

 

무자년 그늘 속에 피어난 꽃을 본다

숨골 안 멈춰버린 심장 하나 살리려고

흰머리 휘휘 날리며 곶자왈에 버티네

 

보고픈 가족 얼굴 눈부처로 새겨놓고

속심ᄒᆞ라 속심ᄒᆞ라 애타는 손짓으로

아찔한 가시낭 틈에 짙은 향 터트리네

 

밥 한술 넘겼던 일

쉬 마르지 않았네

갇혔던 영혼들이 울어대는 초봄쯤

저지리 벳바른 궤*에 백서향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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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벳바른 궤 :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곶자왈에 있는 43유적 조그만 굴.

 

 

 

 

그 폭낭 아래

 

 

놀이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았다

마당은 너무 좁고 무엇과도 닿지 않아

철없는 나를 업고서 옛집과 살아갔지

 

중심이 된다는 건 누군가 기대는 곳

겨울날 코흘리개들 비석치기 모여들면

시멘트 덧댄 몸으로 모진 세월 버텼지

 

바쁜디 뭣허레 와시니

반가움도 죄만 같던

당신의 목소리가 유언처럼 전해오며

한 생이 다 흘러가도 어머니로 서 있다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