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정역을 지나며 - 김영란
수줍은 사랑고백처럼 생강나무 꽃 피어요
옴팍한 떡시루 같은 봄·봄 실레마을
야윈 목 앓는 소리로 노란 꽃이 피었어요
청량리 경춘선 타고 배웅하는 봄바람
그토록 살고 싶던 스물아홉 생의 벼랑
유정도 유정하여서 역으로 남았을까요
받지 못한 답장처럼 삼월에 눈 내려요
점순이 고 가시내는 닭갈비를 판다네요
그대는 마지막 편지 누구에게 쓸 건가요
♧ 움파야 – 김영숙
-자살미수사건 판결문을 보고
들려줘 남은 너의 이야기
우린 그게 궁금해
속대 노란 오늘은
많이 아플지 몰라
모두가 기다리고 있어
네가 쓸 페이지를
♧ 하류 예감 - 김정숙
갱년기가 사춘기보다
몇 배 더 무섭다며
몰아치고 휩쓸리며 혼미한 정신 들쑤실 때
누가 나
정리 좀 해줘요
끝도 없는 NO년기
♧ 봄의 설계도 - 김진숙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꽃의 안간힘을
낙엽 이불 끌어당겨 겨울 넘긴 노루귀
살아서 돌아온 사람 그 눈빛이 그럴 거
그 환한 눈빛에 그만
무릎 꿇고 앉았다
언 땅을 뚫기 위해 끌어주고 밀어주고
조막손 맞닿은 온기
젖 빨던 힘이 그럴 거
언제나 봄의 문장은 꽃이 먼저 쓴다지만
찬바람 오래 머물던 젖은 땅에 닿아 보면
옳거니 박수 소리가
귓바퀴에 감길 거
♧ 활을 쏘다 – 오영호
잡생각 다 지우고
비정비팔(非正非八)로 서서
무심의 가슴으로 하늘의 기를 모아
천천히 활을 들여 올려
과녁 향해 겨눕니다
팽팽한 시위 끝에
부르르 떠는 화살
톡 놓자
하늘길 내며
날아가 맞는 순간
쌓인 한
카타르시스
엔도르핀 번집니다
* 계간 『제주문학』 2023년 봄호(통권 80호)에서
*사진 : 요즘 한라산에서 피어나는 설앵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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