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말 - 양시연
오십 대 중반에도 저렇게 예쁠 수 있다니!
그녀가 다녀간 날은 어김없이 비가 왔다
여태껏 한마디 말도 세상에 못 내뱉어본
그랬다 농아였다, 선천성 농아였다.
여성상담하는 내게 무얼 자꾸 말하려는데
도저히 그 말 그 몸짓 알아듣질 못했다
나는 그날부터 수어手語 공부 다녔다
기어코 그녀의 말, 그 손말을 알아냈다
그렇게 하늘의 언어 아름답게 말하다니!
♧ 어느 등짝 - 김미영
누가 이 섬 안에 부려놓은 바위인가
녹동항 배에 실려
아버지 등에 실려
열세 살 소년의 눈에 여태 남은 어느 등짝
여기까지 업고와 등을 돌린 그믐달
칠십년 흘렀지만 단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운 서울 한쪽
창파에 떠 있지만 소록소록 소록도
한센병의 섬에도 연애질은 있었나보다
눈 한쪽 귀 한쪽 없어도 비익조比翼鳥 사랑은 남아
때마침 후드드득 한소절의 소낙비
팔뚝에 낀 우산으로 외려 나를 받쳐준다
한시도 내리지 못 한 십자가 같은 저 등짝
♧ 꽝에는 꽝 - 김현진
감수꽝
오람수꽝
오일장 동태 할망
벵삭벵삭 웃지만 한 손에는 무쇠 칼
얼마꽝?
대답 대신에
도마 찍듯 대가리 꽝!
♧ 쇠비름 – 강경아
감굴꽃 올 때 맞추나 쇠비름이 돋아난다
이른 봄 이랑이랑 자갈돌 같은 이야기들
한평생 어머니 설움 귤꽃으로 피어난다
지난밤 아버진 또 화투패를 만지셨나
어머닌 벌써 일어나 김을 매러 나가시고
천여 평 감귤밭에는 호미 끝 더 뜨겁겠다
내 삶도 편집하면 몇 줄 글이 남을까
대문도 하나 없고 감출 것 없는 골목 너머
맨땅에 쇠비름처럼 온몸으로 그린 한생
♧ 녹슬어간다 – 고순심
이른 새벽 가로등 불빛이
골다공증 걸린 뼛속 앙상한 초가집을 비춘다
구멍 숭숭 뚫린 나무 문짝 거슬린 지붕
비뚤어진 문패에 희미하게 남겨진
정생丁生이란 이름으로 못 박혀 살아온 세월
제주의 비바람 온몸으로 버틴 초가에 새겨진
못 하나 녹슬어 헐거워진 이름으로 삐걱거린다
못처럼 꼬장꼬장하게 살았을 정생
그 자리에 박힌 채 녹슬어왔다
적막이 안개처럼 흐르는 새벽
유모차에 달그락거리는 공병空甁을 다독이면서
앙상한 다리 휘청이는 그림자 질질 끌며 걷는다
이 새벽 무엇을 찾아가는 겐지
시간을 잊은 채 새벽을 건너는 초가집
녹슨 못 하나 삐걱거린다
고향집에서 저렇게 녹슬고 있을 어머니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 (황금알, 2023)에서
*사진 :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제주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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