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1)

김창집 2023. 5. 18. 08:16

 

 

손말 - 양시연

 

 

오십 대 중반에도 저렇게 예쁠 수 있다니!

그녀가 다녀간 날은 어김없이 비가 왔다

여태껏 한마디 말도 세상에 못 내뱉어본

 

그랬다 농아였다, 선천성 농아였다.

여성상담하는 내게 무얼 자꾸 말하려는데

도저히 그 말 그 몸짓 알아듣질 못했다

 

나는 그날부터 수어手語 공부 다녔다

기어코 그녀의 말, 그 손말을 알아냈다

그렇게 하늘의 언어 아름답게 말하다니!

 

 

 

 

어느 등짝 - 김미영

 

 

누가 이 섬 안에 부려놓은 바위인가

녹동항 배에 실려

아버지 등에 실려

열세 살 소년의 눈에 여태 남은 어느 등짝

 

여기까지 업고와 등을 돌린 그믐달

칠십년 흘렀지만 단 한번 보지 못한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그리운 서울 한쪽

 

창파에 떠 있지만 소록소록 소록도

한센병의 섬에도 연애질은 있었나보다

눈 한쪽 귀 한쪽 없어도 비익조比翼鳥 사랑은 남아

 

때마침 후드드득 한소절의 소낙비

팔뚝에 낀 우산으로 외려 나를 받쳐준다

한시도 내리지 못 한 십자가 같은 저 등짝

 

 

 

 

꽝에는 꽝 - 김현진

 

 

감수꽝

오람수꽝

오일장 동태 할망

벵삭벵삭 웃지만 한 손에는 무쇠 칼

얼마꽝?

대답 대신에

도마 찍듯 대가리 꽝!

 

 

 

 

쇠비름 강경아

 

 

감굴꽃 올 때 맞추나 쇠비름이 돋아난다

이른 봄 이랑이랑 자갈돌 같은 이야기들

한평생 어머니 설움 귤꽃으로 피어난다

 

지난밤 아버진 또 화투패를 만지셨나

어머닌 벌써 일어나 김을 매러 나가시고

천여 평 감귤밭에는 호미 끝 더 뜨겁겠다

 

내 삶도 편집하면 몇 줄 글이 남을까

대문도 하나 없고 감출 것 없는 골목 너머

맨땅에 쇠비름처럼 온몸으로 그린 한생

 

 

 

 

녹슬어간다 고순심

 

 

이른 새벽 가로등 불빛이

골다공증 걸린 뼛속 앙상한 초가집을 비춘다

구멍 숭숭 뚫린 나무 문짝 거슬린 지붕

비뚤어진 문패에 희미하게 남겨진

정생丁生이란 이름으로 못 박혀 살아온 세월

제주의 비바람 온몸으로 버틴 초가에 새겨진

못 하나 녹슬어 헐거워진 이름으로 삐걱거린다

못처럼 꼬장꼬장하게 살았을 정생

그 자리에 박힌 채 녹슬어왔다

적막이 안개처럼 흐르는 새벽

유모차에 달그락거리는 공병空甁을 다독이면서

앙상한 다리 휘청이는 그림자 질질 끌며 걷는다

이 새벽 무엇을 찾아가는 겐지

시간을 잊은 채 새벽을 건너는 초가집

녹슨 못 하나 삐걱거린다

고향집에서 저렇게 녹슬고 있을 어머니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황금알, 2023)에서

                   *사진 :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제주 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