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3)

김창집 2023. 5. 21. 07:19

*배롱나무

 

 

목백일홍 분홍분홍 - 황현중

 

 

어릴 적 나는 공부를 지독 못했다

시험지에 늘 날카로운 사선 가득했으니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살갗에 칼날 스치는 것처럼 아프지만

딱 한 번뿐이었던 내 인생의 환희

오답을 정답으로

내 시험지를 사선 대신

동그라미, 동그라미로 가득 채우시며

너는 오답이 아니야, 하시던

아픈 그때

나의 아름다운 선생님

나머지 공부로 저물어 가는 창 너머

내 가슴 파고들던 분홍분홍 목백일홍

어려운 이 세상

나는 여전히 오답으로 살기에 바쁘지만

오답의 눈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답 목백일홍 분홍분홍

 

 

*진달래

 

 

꽃 몸살 강우현

 

 

병점성당 벚나무 아래

응답받지 못한 기도만 서성이는 저녁

꽃들의 유혹 고봉이다

 

죄인처럼 고개 떨군 로만칼라는

무슨 방패로 막아내느라 게으른 일꾼처럼 걷나

 

신부와 사내가 싸우면 주먹 쥐고 대드는 놈은 어쩌나 이 봄날

흠씬 때리고도 심장이 서늘히 아플 짐승

부를 수 없는 이름 만삭일 텐데

 

바닥 환하도록 꽃바구니 몽땅 엎어야 끝나는 싸움

비버 이빨 같은 촉이 파랗게 돋아야 하는데

 

도진 꽃 몸살

이승의 갈림길 넘어가느라

우묵한 그늘 오달지게 까맣다

신과 사람이 한 끗 차이인 듯

 

 

*산딸나무

 

 

오래된 책 김정옥

 

 

단추 하나 풀린 적이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습니다

 

발걸음 소리는 자주 들렸습니다

 

손을 내미는 이 없이

얼굴에 검버섯이 피었습니다

 

손가락이 와 닿는 느낌이

이런 것이었군요

 

질마재 신부처럼 마음이 풀썩

내려앉습니다

 

 

*찔레꽃

 

 

찔레꽃 - 허향숙

 

 

찔레꽃 만개한 봄날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엄마는

 

에구, 나 죽으면 우리 향이 불쌍해서 우짤꼬

 

엄마의 한숨이

찔레가시처럼 아파

엄마 손에 매달려 폭폭 울었다

 

그즈음 엄마는

일 년에 두어 번

몸속 꽃씨 발라내며

텅 빈 가슴으로 살았다고

 

비어지는 몸 추스르며

가물가물 들려주셨다

병실 밖 색 바랜 기와 위로 봄볕이

노곤하게 내려앉고

담장 주위로

수 천 송이의 찔레꽃이

포말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찔레꽃 향기 앞에 서면

기억은 힘이 세진다

소독 냄새 왈칵, 쏟아진다

 

 

 

 

그 바다 - 제갈양

 

 

미미하고 낮은 것들이 흐르고 흘러들어

마지막으로 기대어 숨을 쉬는 거기

싫고 좋고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모이고 섞여 얽히고설키며 거부하지 않으며

터지고 용솟음치고 고요해지며

밀리고 쓸리며 노래를 멈춘 적 없는

 

그 바다 앞에 섰을땐

덕지덕지 묻혀온 것들 온전히 내던지고

헐벗고 가벼워져 온몸이 가늘어져도 좋다

먼지 자욱한 날들 바람에 너풀대듯 널어놓고

노을 속으로 잠기는 새 한 마리로 날며

고즈넉하게 붉게 물들어 가도 좋겠다

 

 

                                             *월간 우리5월호(통권 4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