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백일홍 분홍분홍 - 황현중
어릴 적 나는 공부를 지독 못했다
시험지에 늘 날카로운 사선 가득했으니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살갗에 칼날 스치는 것처럼 아프지만
딱 한 번뿐이었던 내 인생의 환희
오답을 정답으로
내 시험지를 사선 대신
동그라미, 동그라미로 가득 채우시며
너는 오답이 아니야, 하시던
아픈 그때
나의 아름다운 선생님
나머지 공부로 저물어 가는 창 너머
내 가슴 파고들던 분홍분홍 목백일홍
어려운 이 세상
나는 여전히 오답으로 살기에 바쁘지만
오답의 눈물 속에서 피어오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답 목백일홍 분홍분홍
♧ 꽃 몸살 – 강우현
병점성당 벚나무 아래
응답받지 못한 기도만 서성이는 저녁
꽃들의 유혹 고봉이다
죄인처럼 고개 떨군 로만칼라는
무슨 방패로 막아내느라 게으른 일꾼처럼 걷나
신부와 사내가 싸우면 주먹 쥐고 대드는 놈은 어쩌나 이 봄날
흠씬 때리고도 심장이 서늘히 아플 짐승
부를 수 없는 이름 만삭일 텐데
바닥 환하도록 꽃바구니 몽땅 엎어야 끝나는 싸움
비버 이빨 같은 촉이 파랗게 돋아야 하는데
도진 꽃 몸살
이승의 갈림길 넘어가느라
우묵한 그늘 오달지게 까맣다
신과 사람이 한 끗 차이인 듯
♧ 오래된 책 – 김정옥
단추 하나 풀린 적이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었습니다
발걸음 소리는 자주 들렸습니다
손을 내미는 이 없이
얼굴에 검버섯이 피었습니다
손가락이 와 닿는 느낌이
이런 것이었군요
질마재 신부처럼 마음이 풀썩
내려앉습니다
♧ 찔레꽃 - 허향숙
찔레꽃 만개한 봄날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엄마는
에구, 나 죽으면 우리 향이 불쌍해서 우짤꼬
엄마의 한숨이
찔레가시처럼 아파
엄마 손에 매달려 폭폭 울었다
그즈음 엄마는
일 년에 두어 번
몸속 꽃씨 발라내며
텅 빈 가슴으로 살았다고
비어지는 몸 추스르며
가물가물 들려주셨다
병실 밖 색 바랜 기와 위로 봄볕이
노곤하게 내려앉고
담장 주위로
수 천 송이의 찔레꽃이
포말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찔레꽃 향기 앞에 서면
기억은 힘이 세진다
소독 냄새 왈칵, 쏟아진다
♧ 그 바다 - 제갈양
미미하고 낮은 것들이 흐르고 흘러들어
마지막으로 기대어 숨을 쉬는 거기
싫고 좋고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모이고 섞여 얽히고설키며 거부하지 않으며
터지고 용솟음치고 고요해지며
밀리고 쓸리며 노래를 멈춘 적 없는
그 바다 앞에 섰을땐
덕지덕지 묻혀온 것들 온전히 내던지고
헐벗고 가벼워져 온몸이 가늘어져도 좋다
먼지 자욱한 날들 바람에 너풀대듯 널어놓고
노을 속으로 잠기는 새 한 마리로 날며
고즈넉하게 붉게 물들어 가도 좋겠다
*월간 『우리詩』 5월호(통권 41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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