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3)

김창집 2023. 5. 26. 01:33

 

 

먼 동네에서 이발하고 싶은 날 - 강덕환

 

 

뜬금없어도 좋다

고맙게 잘 받았다고만 하고

이러저러 꽂아 둔 시집 하나 챙겨 들고

환승하면 되지 뭐, 굳이

노선버스 익히지 못해도

방향만 맞으면 버스를 탄다

 

창가 쪽이면 덜컹거리는 맨 뒤 좌석이어도 좋다

햇빛이 들면 읽던 시집으로 가리고

졸린 눈은 차창으로 스미는

바람결에 맡겨줘도 좋다

언뜻 키 큰 정자나무, 그 옆

빙빙 도는 빨파흰 이발소 표시등이 보이걸랑

허둥대며 하차 벨을 누르자

 

선뜻 들어서 단골일 것 같은 유리문

힘주어 열면 훅, 포마드 냄새

와락 안기던 낮은 지붕 삼거리 이발소에서

하루를 몽땅 저당 잡혀도 좋겠다

 

먼 동네까지 와서야 비로소

늘어난 새치가 낭자하게 보이걸랑

예상치 않았던 염색이나 해볼까

아차! 카드기가 없지

현금이 없어도 외상이 통할까

 

바람인형보다 먼저 태어나 하루 종일

손님을 부르는 저 이발소 표시등에게

최저임금이나 주고 있을까

머리털을 삼키며 채깍채깍 바리깡이 올라가고

연탄통에다 비누 거품 잔득 묻힌

면도기로 쓰억쓰억 수염을 깎을 때

밀레의 만종 액자에 파리똥 덕지덕지 붙었어도

마냥 잠들고 싶은 날엔

버스를 타고 먼 동네까지 와서

이발하면 엉겨 붙은 삶의 찌꺼기 한 낱쯤

내려놓을 수 있을까

 

 

 

 

연두망 여기는 김경훈

 

 

연두망,

여기는 구좌읍 세 개 마을

세화리 하도리 상도리가 인접하는 곳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연대가 있던 곳

일제에 맞선 해녀들의 함성과

43의 비명이 교차하는 곳

항일이 함성은 기념탑으로 솟았지만

43의 죽음은 빗물로 가라앉은 곳

항일의 주도세력들은

43의 한라산에서 죽어가고

그의 가족들이 대신 끌려와 학살당한 곳

43은 항일의 유전자라고

누구 하나 입 열어 말하지 않는 곳

푯말 하나 없이 43의 기억이 사라지는 곳

아직도 세 개 마을이 화합하지 못하는 곳

연대의 불꽃이 꺼진 곳

여기는,

연두망

 

 

 

 

나무로 살아가기 - 김순선

     -2022년 작은 세상 그 예술의 풍경 선물전 강미순 작품을 보고

 

 

말을 아끼듯

몸으로 말하는 사람

주홍글씨 같은 침묵을

목에 걸고

모진 세월 버티어왔다

날마다 토해내고 싶은 울분

안으로 삭이며

오롯이

내가 나다움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햇빛과

비와 바람의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인내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으리라

흉흉한 세월 다 보내면서도

잎을 피울 수 있었으리라

가지가 휘어지고 몸이 뒤틀리면서도

누군가의 그늘이 될 수 있었으리라

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자유 나기철

 

 

살면서 때때로 오는 두려움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카잔차키스는 마지막,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외쳤을까

 

늦게 미룬 밥상 앞에 앉아

두려워 밀쳐둔 고기부터 씹는다

씹으면 불편한 내가

 

어느 시인은 익사할 뻔한 뒤

일부러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 장이지

 

 

   부치지 않아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편지가 있습니다 초원사진관의 유리창은 차갑게 선 채 두 사람의 이별을 얼비추지만…… 부치지 않았는데도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편지가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입니다 초원사진관의 유리창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간이 고이고, 사진 속 정든 사람들이 날마다 눈빛을 주는 우리에게 낯익고 엄연한 세상이 색깔의 향연으로 번집니다

   투명한 편지지에 입김이 어립니다 빨간색과 초록색으로 된 초원사진관의 간판 글씨는 크리스마스의 포인세티아가 아니냐던 눈이 큰 제자가 생각납니다 포인세티아가 크리스마스 트리로 변하고 트리 위로 별이 쏟아지는 이미지의 연습을 합니다 동네 사진관의 통유리 속 하늘에다 빛의 눈사람을 뭉쳐 세워도 봅니다 스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8월의 눈사람입니다

 

 

                         *계간 제주문학 2023년 봄호(통권 8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