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2)

김창집 2023. 5. 24. 03:20

 

 

적당한 핑계 - 양시연

 

 

용수리는 내 고향

떠나는 땅이었다

저마다 수평선을 안 넘으면 안 되는 듯

가서는 그저 그렇게 돌아오질 않았다

 

얼굴이며

이름마저 가뭇가뭇 잊힐 무렵

적당한 핑계를 대며 친구들이 돌아온다

반세기 거슬러 와서 동창회가 열리다니!

 

그래,

용수리는 돌아오는 땅이다

그 옛날 <라파엘호>도 괜히 여기 흘러왔을까

반도에 첫 미사 드린, 돌아와야 하는 땅이다

 

 

 

 

섬 잔디 지듯 - 김미영

 

 

아침에 문안 인사 저녁에 소쩍소쩍

소쩍소쩍 소쩍소쩍 그 소리 되돌아와

황사평 섬 잔디 지듯 그렇게 소쩍소쩍

 

가야호 삼등칸에 실어놓은 연륙의 꿈

어쩌다 사라봉 기슭 둥지를 틀어놓고

백구두 날 선 백바지 한량 같은 내 아버지

 

반세기 세월 따라 영평동 끝자락에

순리이듯 반역이듯 그렇게 나란히 묻혀

그 옛날 순댓국 냄새 소쩍소쩍 되돌아온다.

 

왜 참고만 살았어요?” 철없는 내 물음에

실은 말이야 늬 아버지 내가 더 좋아했다.”

어머니 고백성사를 나도 따라 해 본다.

 

 

 

 

동문아리랑 1 - 김현진

 

 

까만 손톱으로 하얗게 간 쪽파 몇 줌

그 옆에 마른 고사리 오분작도 한 접시

맨바닥 봉다리 행렬 아리아리 동문시장

 

장사가 뭐 별건가 궤짝만 엎으면 되지

명함 한 장 내밀듯 간판마다 고향 이름

상 갑써, 싸게 줄랑께반반 섞인 사투리

 

나는야 서울 토박이 어쩌다 흘러와서

오메기뜻도 모른 채 오메기 오메기떡장수

아리랑 동문아리랑 내 곡조도 섞인다

 

 

 

 

어떤 고려장 - 강경아

 

 

팔순 노부부가 정기검진 받는 날

마지못해 투덜투덜 마중 나온 손자 녀석

병원을 나오자마자 택시 불러놨어요

 

하소하듯 손자에게 점심하자 하는데

대답도 건성건성 휴대폰만 만진다

기어이 고려장 하듯 택시 태워 잘 가란다

 

 

 

 

할머니의 방 - 고순심

 

 

삶은 콩나물 체에 받쳐 드는데

시루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또르르 들린다

할머니는 방안에서 콩나물을 기르셨다

대가리가 시루를 넘을 때마다

콩나물 같은 시간들

청상의 가슴 누르듯

꾹꾹 누르며 물을 주신다

또르르 할머니 오줌 누는 소리

군용 담요 속에서 피어오르는

콩나물처럼 비릿한 할머니 내음

창호지를 바른 세살문 방 안에서 잠이 들면

이불을 꾹꾹 눌러주며 뱉던 혼잣말

비릿한 적삼 내음이 코끝에 스친다

자식 키우듯 콩나물 키우며 살아온

헐거워진 동굴의 결로結露

콩나물시루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날 때면

할머니 오줌 누는 소리 함께 들린다

또르르 잠결에 들린다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황금알, 2023)에서

                 *사진 : 요즘 한창인 산딸나무 꽃(2023.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