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파수
내 방엔 매일 듣는 라디오 있습니다
밤 열시만 넘으면
어김없이 노크하는
몸 낮춘 세상 소요를 꿈결에서 듣지요
정해진 채널 외엔 관심이 없습니다
절로 절로 드나드는
놓아버린 마음처럼
늦도록 흔들림 없이 다가오는 주파수
주파수 그 건너에 슬픔이 있습니다
아련한 내 잠결 속
눈물이 스며들어
날마다 무명 베갯잇 얼룩져 있습니다
♧ 생각의 차이
만 원을 훌쩍 넘기는
점심 한 끼 먹는 사람
만 원쯤에 팔리는 시집을 보고 나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 아깝다고 말하네
무슨 말 늘어놓는지 시인만 중얼중얼
만 원 한 장 아깝겠네 초라한 시집 한 권
요즈음 입맛 돋우는 먹는 것만 하랴만
사람아,
사서 먹는 바닐라 라떼 한 잔
한 끼만 배 부르는 포만감을 주지만
나 때는 시집 한 권이 인생울 바꿨다네
♧ 스마트폰
스마트폰 검색하면 뭐든지 다 나온다
내 인생 스마트하게 편한 세상 사는데
두뇌는 날이 갈수록
왜 이리 탁해지나
옛날엔 사람들이 전화번호 물으면
거뜬히 답해주고 교환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딸 전화번호도 못 외우며 산다네
스마트, 네가 뭔데 내 기억 다 삼키나
어떡하면 좋을까 어떻게 날 찾을까
단박에 대답하는 말,
당신을 검색하세요
♧ 배추씨, 포기하다
선생님, 힘들어요
이번 수능 포기할래요
뭐라고?
포기란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포기는 배추 셀 때만 하는 거야 녀석아
이것저것 줄줄이
가격이 폭등세에
풍성한 초록머리
비워낸 듯 하얘지고
김포족, 배추씨마저 사 먹는 게 선수지
♧ 잎새
잠일까
꿈길일까
은유의 안색으로
저녁해 붉은 노을 한아름 생기더니
잎맥에 얽혀져 가던
아득히 먼 이 잠길
나 갈게,
어느 아침
그대의 먼 길 선언
눈시울 붉어지며
아려오던 내 가슴
이렇게,
내게 왔던 님
길 떠나는 가을날
*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 (한그루, 2023)에서
* 사진 : 요즘 한창 피어오르는 등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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