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은 산호초 기억 같은'(4)

김창집 2023. 5. 27. 08:53

 

 

주파수

 

 

내 방엔 매일 듣는 라디오 있습니다

밤 열시만 넘으면

어김없이 노크하는

몸 낮춘 세상 소요를 꿈결에서 듣지요

 

정해진 채널 외엔 관심이 없습니다

절로 절로 드나드는

놓아버린 마음처럼

늦도록 흔들림 없이 다가오는 주파수

 

주파수 그 건너에 슬픔이 있습니다

아련한 내 잠결 속

눈물이 스며들어

날마다 무명 베갯잇 얼룩져 있습니다

 

 

 

 

생각의 차이

 

 

만 원을 훌쩍 넘기는

점심 한 끼 먹는 사람

만 원쯤에 팔리는 시집을 보고 나서

책값이 너무 비싸다 아깝다고 말하네

 

무슨 말 늘어놓는지 시인만 중얼중얼

만 원 한 장 아깝겠네 초라한 시집 한 권

요즈음 입맛 돋우는 먹는 것만 하랴만

 

사람아,

사서 먹는 바닐라 라떼 한 잔

한 끼만 배 부르는 포만감을 주지만

나 때는 시집 한 권이 인생울 바꿨다네

 

 

 

 

스마트폰

 

 

스마트폰 검색하면 뭐든지 다 나온다

내 인생 스마트하게 편한 세상 사는데

두뇌는 날이 갈수록

왜 이리 탁해지나

 

옛날엔 사람들이 전화번호 물으면

거뜬히 답해주고 교환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딸 전화번호도 못 외우며 산다네

 

스마트, 네가 뭔데 내 기억 다 삼키나

어떡하면 좋을까 어떻게 날 찾을까

단박에 대답하는 말,

당신을 검색하세요

 

 

 

 

배추씨, 포기하다

 

 

선생님, 힘들어요

이번 수능 포기할래요

뭐라고?

포기란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포기는 배추 셀 때만 하는 거야 녀석아

 

이것저것 줄줄이

가격이 폭등세에

풍성한 초록머리

비워낸 듯 하얘지고

김포족, 배추씨마저 사 먹는 게 선수지

 

 

 

 

잎새

 

 

잠일까

꿈길일까

은유의 안색으로

저녁해 붉은 노을 한아름 생기더니

잎맥에 얽혀져 가던

아득히 먼 이 잠길

 

나 갈게,

어느 아침

그대의 먼 길 선언

눈시울 붉어지며

아려오던 내 가슴

이렇게,

내게 왔던 님

길 떠나는 가을날

 

 

       *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한그루, 2023)에서

                                * 사진 : 요즘 한창 피어오르는 등수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