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박 중심 – 이향지
단맛에 끌려 앉혔으니
호박이 우리 밥상의 중심이었다
흐린 아침이면 더 밝은 등을 켜던 호박꽃
호박 하나 따다 줄래
따낸 구덩이에 잔반을 묻어주던 어머니
따다 드리면 너무 작다 퇴짜 맞고
다시 따온 호박에는 씨가 쪼로로 박혀
호박은 내 이명의 태초
호박 하나 따다 줄래
싫을수록 더 멀리로 달아나던 귀
골짜기가 많아, 골짜기가 많아, 흔들어 보면
호박씨 메아리
더 세게 흔들면 엄마의 잔소리 넝쿨
호박을 먹고
호박에게도 먹이며
길고 무더운 계절을 붙잡고 넘었다
어떤 호박이나 떡잎 두 장으로 시작하지만
장독대 옆 호박은 불같아 먼저 흙이 되고
밭두렁 누렁탱이는 서리 때까지 버텨 보약이 되었다
단맛에 끌러서 모였으니
우리 밥상의 중심은 바뀔 줄을 몰랐다
♧ 기린 – 장문석
기린은 아주 잠깐 쪽잠을 잔다
그것도 나무 밑에 웅크려
그 긴 모가지를 용수철처럼
휘감고 잔다
적들의 기척이 있으면
재빨리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물을 마실 때도
네 다리를 활짝 펼친다
그 무거운 모가지를 받치기 위함이다
무릎을 꿇지 못한다
적들이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가지를 더 길게 치빼려
하루하루 애를 쓴다
더 먼 데까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높은 데까지 혀를 치빼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옆에 새끼가 있기 때문이다
♧ 화산*의 기원 – 김성중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가기 전
화산을 기어서 오르며 보았네
쇠사슬에 채워진 자물쇠를
얼마나 간절한 기원이길래
계단으로 겨우 오르는 산
험한 바윗길에 자물쇠를 채웠나
다닥다닥 붙어서 세월을 견디는
화산 자물쇠를 만지며
내 마음도 덩달아 굳세어지는데
위쪽에 개광쇄開光鎖
왼쪽에 화산신령華山神靈
오른쪽에 영보평안永保平安
아래쪽에 건강장수健康長壽
한가운데에 커다란 복福
믿음이 강한 자여
자물쇠가 녹이 슬지라도
그대의 믿음은 더욱 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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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 중국 산시성에 있는, 높이가 2,200미터인 산.
♧ 산다는 것 – 이기헌
길을 가다가
깊은 구렁에 빠져버린
귀뚜라미를 만난다
자비의 손을 내밀어
구원해 준다
고난을 벗어난 귀뚜라미는
훌훌 털어버리고
풀숲 사이로 사라진다
나 또한 가던 길을 간다
산다는 것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제 갈 길을 가는 것
저 귀뚜라미가
이 밤을 어디서 보낼지
걱정하지 않는 것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가을은 깊어갈 것이니
나는 다시 가던 길을 간다
♧ 노을을 읽다 - 성숙옥
지는 해
불타는 노을을 읽는다
뜨겁게 살다 지는
열정의 마지막이 저리 화려한 뒷모습이라니
얽힌 구름을 파고드는 붉은색의 향연
틈과 틈 사이 여린 빛살이 가는 마음을 붙잡지 말라 한다
눈에 넣어도 부시지 않는 빛에 밑줄 긋는다
다른 세상에서 보내온 편지 같은 문장
계절도 없이 연속 펼치는 장면이라도 볼 때마다 감동이다
모든 길이 하나로 모이는
어둠 앞에 색은 가지런해지기 시작하고
글자 사이 스며드는 어둠으로
읽어내지 못한 문장이 있는 것 같지만
가는 것에 대한 의미 부여에 동그라미 그리는데
날은 저물고 고요히 다가서는 적막 사이
우뚝 빛을 발하는 키 큰 건물이 저녁을 밝힌다
* 월간 『우리詩』 2023년 5월호(통권 41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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