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5)

김창집 2023. 5. 30. 05:47

 

 

호박 중심 이향지

 

 

단맛에 끌려 앉혔으니

호박이 우리 밥상의 중심이었다

 

흐린 아침이면 더 밝은 등을 켜던 호박꽃

 

호박 하나 따다 줄래

따낸 구덩이에 잔반을 묻어주던 어머니

 

따다 드리면 너무 작다 퇴짜 맞고

다시 따온 호박에는 씨가 쪼로로 박혀

호박은 내 이명의 태초

 

호박 하나 따다 줄래

싫을수록 더 멀리로 달아나던 귀

 

골짜기가 많아, 골짜기가 많아, 흔들어 보면

호박씨 메아리

더 세게 흔들면 엄마의 잔소리 넝쿨

 

호박을 먹고

호박에게도 먹이며

길고 무더운 계절을 붙잡고 넘었다

 

어떤 호박이나 떡잎 두 장으로 시작하지만

장독대 옆 호박은 불같아 먼저 흙이 되고

밭두렁 누렁탱이는 서리 때까지 버텨 보약이 되었다

 

단맛에 끌러서 모였으니

우리 밥상의 중심은 바뀔 줄을 몰랐다

 

 

 

 

기린 장문석

 

 

기린은 아주 잠깐 쪽잠을 잔다

그것도 나무 밑에 웅크려

그 긴 모가지를 용수철처럼

휘감고 잔다

적들의 기척이 있으면

재빨리 펼쳐야 하기 때문이다

 

물을 마실 때도

네 다리를 활짝 펼친다

그 무거운 모가지를 받치기 위함이다

무릎을 꿇지 못한다

적들이 나타나면

재빨리 도망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가지를 더 길게 치빼려

하루하루 애를 쓴다

더 먼 데까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높은 데까지 혀를 치빼야 하기 때문이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옆에 새끼가 있기 때문이다

 

 

 

 

화산*의 기원 김성중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가기 전

화산을 기어서 오르며 보았네

쇠사슬에 채워진 자물쇠를

 

얼마나 간절한 기원이길래

계단으로 겨우 오르는 산

험한 바윗길에 자물쇠를 채웠나

 

다닥다닥 붙어서 세월을 견디는

화산 자물쇠를 만지며

내 마음도 덩달아 굳세어지는데

 

위쪽에 개광쇄開光鎖

왼쪽에 화산신령華山神靈

오른쪽에 영보평안永保平安

아래쪽에 건강장수健康長壽

한가운데에 커다란 복

 

믿음이 강한 자여

자물쇠가 녹이 슬지라도

그대의 믿음은 더욱 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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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 중국 산시성에 있는, 높이가 2,200미터인 산.

 

 

 

 

산다는 것 이기헌

 

 

길을 가다가

깊은 구렁에 빠져버린

귀뚜라미를 만난다

자비의 손을 내밀어

구원해 준다

고난을 벗어난 귀뚜라미는

훌훌 털어버리고

풀숲 사이로 사라진다

나 또한 가던 길을 간다

 

산다는 것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제 갈 길을 가는 것

저 귀뚜라미가

이 밤을 어디서 보낼지

걱정하지 않는 것

내가 원하지 않아도

가을은 깊어갈 것이니

나는 다시 가던 길을 간다

 

 

 

 

노을을 읽다 - 성숙옥

 

 

지는 해

불타는 노을을 읽는다

뜨겁게 살다 지는

열정의 마지막이 저리 화려한 뒷모습이라니

얽힌 구름을 파고드는 붉은색의 향연

틈과 틈 사이 여린 빛살이 가는 마음을 붙잡지 말라 한다

눈에 넣어도 부시지 않는 빛에 밑줄 긋는다

다른 세상에서 보내온 편지 같은 문장

계절도 없이 연속 펼치는 장면이라도 볼 때마다 감동이다

모든 길이 하나로 모이는

어둠 앞에 색은 가지런해지기 시작하고

글자 사이 스며드는 어둠으로

읽어내지 못한 문장이 있는 것 같지만

가는 것에 대한 의미 부여에 동그라미 그리는데

날은 저물고 고요히 다가서는 적막 사이

우뚝 빛을 발하는 키 큰 건물이 저녁을 밝힌다

 

 

* 월간 우리20235월호(통권 41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