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척
척 척 척 살아간다
쿨한 척 행복한 척
눈보라 속 털머위꽃처럼
예쁜 척 안 추운 척
입술을 앙다문 채로
척 척 척 살아간다
불 지르며 지는 해
서서히 밀려든다
하루야 늘 가지만 내일은 또 오니까
해 봐야 일상일 뿐이지
내 황혼은 없는 척
연락선에 나를 싣고
물 건너 떠난 사람
물마루를 보면서도 잊은 척 모르는 척
늦게 핀 당산봉 기슭
해국만 날 아는 척
♧ 월급
바닥난 향수,
월급 받고 조말론으로 사야지
거울 속 그녀에게
윙크로 약속했네
입 벌린 빙그레 미소
거울을 뛰쳐나왔네
월급날 365기계
통장 넣고 밥 짓는 소리
쾌속으로 밥통 속 드륵드륵 돌려 삶네
보험료 자동차 할부금 자동이체 정기적금
맨 끝에 초라한 잔액 힐끔힐끔 쳐다보네
허공에 흩뿌리며 조말론,
입 비쭉 웃네
거울로 슬쩍 돌아가
낯빛 바꾼 저 썩소
♧ 수국
잎 넓고 둥근 마음
흐드러지게 피었네
제 가슴 침묵의 소리
숨김없이 피었네
내 청춘
가다 돌아와
그 꽃잎에 머무네
당신은 어진 사람
화낼 줄 모르는 사람
가시 돋친 세상사
꽃으로 품어 안고
온몸에
사랑 고백이
박혀 있는 그 침묵
♧ 시 쓰는 밤
호두까기 인형 된
시가 발레를 한다
발가락에 모아 논
온 몸을 운전하듯
옆걸음 소라게처럼
앞으로 못 나간다
시상詩想은 안에 있고
글 걸음은 게걸음
읽어보니 잡탕이고 상념만 어지럽다
제기랄, 오늘 밤에는 시를 덮고 손 놓자
♧ 제주해녀․20
내 목숨이 나올 때
가장 어린 나이였지
이제는 나이 많은
노인이 돼버렸어
이상해, 세월이란 게
하룻밤 꿈만 같아
여든다섯 때까진
살고 싶던 그 삼촌
일선 해녀 노해녀
여든두 살 이른 봄에
꽃테왁
바다에 두고
먼길을 떠나셨네
*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 (한그루,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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