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정군칠 시집 '물집'의 시(1)

김창집 2023. 6. 5. 00:11

 

 

게와 아이들

 

 

게들은 어쩌자고

밀물을 따라와선

바지락바지락 서귀포를 끌고 가나

 

바다는 어쩌자고

게들을 몰고 와선

한 양푼이 푸우 거품을 쏟아놓나

 

어쩌자고 나는

자꾸만 헛딛는 어린 게의 집게발에 목이 메어

은종소리 쟁쟁거리는 그늘로

스며들고 있나

 

 

 

 

모슬포

 

 

  모슬포에 부는 바람은 날마다 날을 세우더라 밤새 산자락을 에돌던 바람이 마을 어귀에서 한숨 돌릴 때, 슬레이트 낡은 집들은 골마다 파도를 가두어 놓더라 사람들의 눈가에 번진 물기들이 시계탑 아래 좌판으로 모여들어 고무대야 안은 항시 푸르게 일렁이더라 시퍼렇게 눈 부릅뜬 날것들이 바람을 맞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지나 입도 2대조 내 할아비, 무지렁이 생이 지나간 뼈 묻힌 솔밭 길도 굽어 있더라 휘어진 솔가지들이 산의 상처로 파인 암굴을 저 혼자 지키고 있더라 구르고 구른 몽돌들이 입을 닫더라 저마다 섬 하나씩 품고 있더라

 

  날마다 나를 세우는 모슬포 바람이 한겨울에도 피 마른자리 찾아 산자고를 피우더라 모슬포의 모든 길들은 굽어 있더라 그래야 시절마다 다르게 불어오는 바람을 껴안을 수 있다더라 그 길 위에서 그 바람을 들이며 내 등도 서서히 굽어 가더라

 

 

 

 

놋숟가락

 

 

  마을 안길 공사장 포클레인 이빨에 물려나온 놋숟가락 하나가 번쩍, 빛을 되쏜다 어느 집 밥상 위에 놓였을 그것, 끝내 흙과 섞이지 못하고 길이 되지 못한 채 길을 떠받치며 삭아가다 불거졌을 그것, 때가 되면 빛을 내는 근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젯날 감꽃이 뚝뚝 떨어지는 수돗가에 웅크리고 앉아 재 묻힌 짚수세미로 서러운 마음을 벗기듯 놋숟가락을 닦아낼 때 할머니 앞치마에 옮겨 앉던 녹은 무엇이었는지 메밥 옆에 가지런히 놓인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인광으로 살아나던 빛은 무엇이었는지

 

  제상祭床이 차려진 한 구석에 오두마니 앉아 절하는 아버지의 넓은 등짝 너머로 놋숟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머니 눈빛 그 속에 묻어나던 진한 감꽃내

 

 

 

 

유월 스무날

 

 

  밭일 나갔던 어머니가 집으로 일찍 돌아오시는 날은 초복 지나 중복을 며칠 앞둔 유월 스무날 발등으로 떨어지는 해시계의 그림자를 따라 찬물에 밥을 말아 먹고 툇마루에 내갈긴 닭똥을 서너 번 닦아내고 나면 어머니는 어김없이 머리에 쓴 수건을 탁, 탁 털어내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봄날 알을 까고 나온 병아리들은 제법 발목이 거무스레한 중닭으로 자라 있었다 구구구, 어머니의 거짓 모이에 닭들이 뒤뚱거리며 몰려간 헛간의 문을 재빨리 닫고 나는 골목을 향해 냅다 뛰었다 귀를 틀어막았으나 닭들의 비명은 고막 속으로 파고들었다 옷 입은 채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어머니 손에 들린 닭들의 눈은 반쯤 감긴 채 팔팔 끓는 물을 뒤집어썼다 여덟 마리 주검이 감나무 아래 수돗가에 놓였다

 

  멍석 하나로는 넘치는 식구들이 빙 둘러앉은 마당 가운데, 달걀 모양의 달이 빛을 내렸다 어머니는 삶은 닭의 몸통에서 노랗게 익은 여러 개의 달을 꺼내곤 했다 닭 한 마리의 보신으로 삼복더위가 무사히 지나갔다

 

  연례행사처럼 현수막도 없이 치러지던 닭 잡아먹는 날 여섯 그릇으로 줄어든 삼계탕을 마주하는 저녁이면 노랗게 익은 달이 동쪽 하늘에 걸려 있곤 했다

 

 

 

 

바다의 물집

 

 

환한 빛을 따라 나섰네

지금은 달이 문질러 놓은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여에 부딪치는 포말들을

바다의 물집이라 생각했네

부푸는 바다처럼 내 안의 물집도 부풀고

누군가 오래 서성이는 해변의 밤

온통 흰 꽃 핀 화엄의 바다 한켠

애기 업은 돌을 보았네

그 형상 더욱 또렷하였네

 

제 몸 밀어내고 다른 몸을 품고서야 바다는

해변에 닿는다지

버릴 것 다 버린 바다의 화엄이

저 돌로 굳은 것일까

걸러내야 할 것들이 내게도 참 많았네

목이 쉬도록 섬을 돌았네

단지 섬을 돌았을 뿐인데 목이 쉬었네

 

파도의 청징淸澄한 칭얼거림이 자꾸만 들려왔네

깍지 낀 손 풀어 그 울음 잠재우고 싶었으나

달빛은 바다 위에서만 출렁거리고

나는 서늘한 어둠의 한켠에 오래

오래 머물지 못했네

 

 

 

                   * 정군칠 시집 물집(애지, 200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