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의 시(4)

김창집 2023. 6. 2. 00:39

 

 

따라비 물봉선 양시연

 

 

따라비 가는 길은 묵언정진 길이다

그것도 가을 하늘 단청 펼친 오름 앞에

어디에 숨어 있었나, 놀래키는 물봉선

 

그래 저 떼쟁이 예닐곱 살 떼쟁이야

선천성 농아지만 그래도 소리는 남아

어마아, 어마 어마아 그 때 그 소리는 남아

 

그때 그 소리만 붉디붉은 꽃으로 피어

꽃을 떠받치는 저 조막만한 하얀 손

나에게 손말을 거네, 어마아 어마어마

 

 

 

 

두륜산에 걸린 봄 - 김미영

 

 

나는 왜 땅끝에 와도 북쪽만 보는 걸까

굽이굽이 두륜산 둘러앉은 봉우리들

그 속에 땅나리 같은 대흥사도 피었다

 

그래서 내 발길도 예까지 왔었나보다

그댄들 연리근 앞에 약속 한 번 없었을까

물소리 굽이쳐가도 여태 남은 저 낮달

 

때마침 장삼 자락 어느 청춘 걸어 나와

종 한 번 고백 한 번 당 목에 실어낸다

내 가슴 그리움 실어 그리움에 메아리 실어

 

 

 

 

관심술 김현진

 

 

못 보던 점박이 생선 좌판에 올랐기에

몸통에 뜬 보름달 슬쩍 봤을 뿐인데

정말로 그랬을 뿐인데 담아주며 “2만원

 

모처럼 엄마 예쁘네?” 농 한 번 했을 뿐인데

기어이 첫 남자를 가슴에 품었다는 거지?”

정말로 점장이 같네 아직도 모르겠네

 

 

 

 

초가을 바다는 무슨 기도 바칠까 강경아

 

 

초가을

불배들은

뭐가 저리 간절한가

 

한바다

깊은 속을

온몸으로 끌어 올려

 

한밤 내

불을 사르네

제 몸조차 태우네

 

 

 

 

뫼비우스의 띠 - 고순심

 

 

   황혼 즈음 붉은 꽃을 가슴 깊이 숨겨둔 갑옷이라고 하고 흐릿하게 멀어져가는 한 사람의 눈빛을 감추는 안경이라고 하고 세상은 참 좁지만 80 C컵의 가슴으로 보아야 하는 거라서, 숫자 뒤에 알파벳 대문자로 크기를 매기는 거라고 웅얼웅얼 사방으로 내달리는 그녀의 말들을 간신히 가두고 잡아당기는 신경의 끈 만약, 어깨끈이 없으면 마냥 흘러내린 갑옷의 끝은 어디일까? 그녀는 가끔 한 손을 어깨 위로 올려 꼬인 끈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한 번 꼬인 운명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아서 막연한 당신의 침묵처럼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서로에게 닿을 수 없어 그리움에 미어지다가 결국 다음 생에 만나야 뛸 수 있는 심장이라면, 먼 생을 돌고 돌아온 해지는 언덕에서 가시를 잔뜩 세운 채 붉게 일렁이는 꽃을 당신은 알아보기나 할까?

 

 

                                    * 동인지 바람집 사람들(황금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