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6)

김창집 2023. 6. 4. 01:39

 

 

 

 

척 척 척 살아간다

쿨한 척 행복한 척

눈보라 속 털머위꽃처럼

예쁜 척 안 추운 척

입술을 앙다문 채로

척 척 척 살아간다

 

불 지르며 지는 해

서서히 밀려든다

하루야 늘 가지만 내일은 또 오니까

해 봐야 일상일 뿐이지

내 황혼은 없는 척

 

연락선에 나를 싣고

물 건너 떠난 사람

물마루를 보면서도 잊은 척 모르는 척

늦게 핀 당산봉 기슭

해국만 날 아는 척

 

 

 

 

월급

 

 

바닥난 향수,

월급 받고 조말론으로 사야지

거울 속 그녀에게

윙크로 약속했네

입 벌린 빙그레 미소

거울을 뛰쳐나왔네

 

월급날 365기계

통장 넣고 밥 짓는 소리

쾌속으로 밥통 속 드륵드륵 돌려 삶네

보험료 자동차 할부금 자동이체 정기적금

 

맨 끝에 초라한 잔액 힐끔힐끔 쳐다보네

허공에 흩뿌리며 조말론,

입 비쭉 웃네

거울로 슬쩍 돌아가

낯빛 바꾼 저 썩소

 

 

 

 

수국

 

 

잎 넓고 둥근 마음

흐드러지게 피었네

제 가슴 침묵의 소리

숨김없이 피었네

내 청춘

가다 돌아와

그 꽃잎에 머무네

 

당신은 어진 사람

화낼 줄 모르는 사람

가시 돋친 세상사

꽃으로 품어 안고

온몸에

사랑 고백이

박혀 있는 그 침묵

 

 

 

 

시 쓰는 밤

 

 

호두까기 인형 된

시가 발레를 한다

발가락에 모아 논

온 몸을 운전하듯

옆걸음 소라게처럼

앞으로 못 나간다

 

시상詩想은 안에 있고

글 걸음은 게걸음

읽어보니 잡탕이고 상념만 어지럽다

제기랄, 오늘 밤에는 시를 덮고 손 놓자

 

 

 

 

제주해녀20

 

 

내 목숨이 나올 때

가장 어린 나이였지

이제는 나이 많은

노인이 돼버렸어

이상해, 세월이란 게

하룻밤 꿈만 같아

 

여든다섯 때까진

살고 싶던 그 삼촌

일선 해녀 노해녀

여든두 살 이른 봄에

꽃테왁

바다에 두고

먼길을 떠나셨네

 

 

 

      * 김신자 시집 용수리, 슬지 않는 산호초 기억 같은(한그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