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문영종 시집 '물의 법문'의 시(5)

김창집 2023. 6. 26. 11:57

 

 

큰 슬픔은 드러나지 않게 둥지를 튼다

       -큰곶 검흘굴에서

 

 

큰 슬픔은 드러나지 않게 둥지를 튼다

큰곶 검흘굴

들어가는 굴천장이 무너져도 여기 살고 있는

이끼들, 고사리들, 돌무더기들

하늘로 몸을 드러낸 채

나무뿌리들도 공중으로 발을 내민 채

위태롭게 바람을 딛고 빛 속에 서 있다

캄캄한 세상

아직도 무자년 하늘빛 어둠이 쌓여 있다

하늘이 펑 뚫려 살 만한 세상 열리기

이 동굴 어디에 숨어서 기다리던 이들

다 죽어 없다

동굴은 삶의 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이었던 것을

더 이상 깊숙이

나는 걸어갈 수가 없다

 

 

 

 

용눈이오름

 

 

휘어진 곡선이 관능적이다

매혹적인 여인이 살고 있다

마주보이는 다랑쉬오름보다 가파르지 않아 안심된다

입구에 도착하니 싸락눈이 쏟아진다

용눈이 능선 오르는 것은 그리운 이 만나는 기분이다

우리보다 앞서 혼자서 가는 이가 있다

어느새 능선 건너편에 그가 쓸쓸해진다

수평선에 걸린 외로운 배 같다

제비꽃, 물매화, 꽃향유, 할미꽃 다 숨어 있다

억새풀들 견디기 힘들었던 상처 있다

허공에 까마귀 울음 있다

내려다보니 흙에 묻히는 죽음 있다

오늘따라 오름 주변 무덤 많이 보인다

모든 길들은 죽은 자와도 통하는 문이다

수평선도 죽음과 닿아있는가

수평선이 없어졌다

싸락눈 때문인가 안개 때문인가

섬 전체가 죽음 한가운데 있다

아직 떠나지 못한 까마귀 울음 있다

 

 

 

 

마음의 풀을 베다

 

 

풀을 베자 풀 더미와 함께

사마귀 한 마리 삭둑 잘린다

반으로 두 동강난 사마귀

눈 시퍼렇게 살아 째려본다

풀 냄새가 피 냄새 되어 달려든다

풀을 베어갈수록

곤충들은 놀래어 제각기 달아난다

이산가족이다

난 한 세계를 죄의식도 없이 파괴했다

무덤도 풀을 자라게 해서

숱한 생명을 키워왔을 것이다

배 밑에 둥그런 알집을 매단 거미

새끼를 부화시키지도 못하고

상사화 곁에서 죽어 있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꽃

이 꽃만이라도 무덤과 벗하게

고이 남겨두리라

참말로 오늘 살생을 많이 했다.

 

 

 

 

달팽이

 

 

그는 너무 느리다

귀가 없어 소리 하나 들을 수 없고

혀도 없어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한다

비가 오거나 축축한 날

먼 순례 떠나기를 좋아한다

한 칸뿐인 집을 등에 지고

오채투지하며

 

누가 그만큼 진실된 걸음걸이를 보여줄 수 있으랴

생에 대한 가식도 없이

 

나무 밑둥치에서 해와 달이 거닐곤 하는 우듬지까지

그가 남기고 간 기다란 발자국을 볼 수 있다

그 흔적은 어쩌면 뜨거운 입맞춤이기도 하리라

그래서 햇빛에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는 가느다란 뿔눈을 치켜세우며

생을 가늠하기도 한다

 

그가 물방울처럼 잎사귀에 앉아 있거나

그늘진 담벼락에 달라붙어 있는 그를 보면

 

묵묵히 가시라

암자에 칩거해서 묵상하는 수행승이니까

 

 

 

 

나는 바퀴를 본 것일까

 

 

형광등이 희미하게 졸고

숨소리만 살아 벽을 더듬고 있다

바퀴 하나

오랜 시간 머문 바람벽에

가시 돋친 발로 착 달라붙어

어둡고 축축한 세상 기어 다니며

납작해진 촉각 곤두세워

생존을 더듬이질 하고 있다

갈색 갑옷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빛

지친 내 눈동자를 찌른다

어느 새 천장가지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

취한 듯 내려다보고 있다

시시하다 내 눈길 따위엔 꼼짝없다

죽여버릴까

파리채를 잡아든다

꽁무니에도 촉수가 두 개나 달려 있어

생의 무게에 민감한 저놈의 바퀴녀석

, 어디로 갔나, 없다

나는 바퀴를 본 것일까

바퀴가 나를 본 것일까

 

 

                   * 문영종 시집 물의 법문도서출판 각, 201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