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2)

김창집 2023. 6. 28. 08:23

 

 

유홍초꽃

 

 

보슬비 내리는 늦여름

고향 밭둑길에서

홍순이를 만났다

그 옛날 내 옆구리 쿡쿡 찌르며

한번 안아 달라고 매달리던

그렇게 발랑발랑 까졌던

그 계집애 홍순이

수십 년 동안 까맣게 잊었던 홍순이가

밭둑길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터앉아

빨간 입술을 홀라당 까고는

배시시 웃고 있다

 

 

 

 

동백

 

 

구질구질한 건 질색

죽어도 모가지 팍 꺾고 따갈따갈 구를 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핏빛 사랑

 

서걱거리는 모래바람에도

북풍한설에도

자욱 하나 남지 않은

사시사철 푸른빛 놓지 않고

한 번 붉게 피었다가

!

뛰어내리는 것이다

동백이

 

 

 

 

자두꽃

 

 

이른 봄

하얗게 센 머리에

비녀를 곱게 꽂은 할머니는

밭둑에 앉아서

늘 하늘을 쳐다보시더니

어느 바람 심하게 불던 날

홀연히 서쪽하늘로 날아가셨다

노을은 불타올랐고

붉은 도화는 자분자분 마을 안까지 들어와

치맛자락을 여미며 밤을 밝혔다

 

할머니 떠나신 자리에 두견새가 날아와 앉았다.

 

 

 

 

얼음꽃

 

 

냉혈의 후손

백혈의 유전자를 타고난 것은 숙명

투명한 소통의 가치를 지키고 싶을 뿐

 

햇빛에 집착하는 꽃들의 사랑

통속적이라 치부하는 것은 아니다

 

섣달그믐날 밤 쏟아지는 별빛을 한 올 한 올 엮어

시베리아의 냉기를 듬뿍 버무려야만

비로소 꽃이 된다

한기 가득한 물꽃이 된다

 

단 한 번 태양을 향해 가슴을 열고

홀연히 죽는 시린 사랑이다

 

 

 

 

토끼풀꽃

 

 

친정 간다고 나간 아내가

아침 잔디밭 모퉁이에 앉아 있다

재주도 없는 내게 시집와서 행여나

꽃밭에라도 앉아 볼까 했을 텐데

평생을 잡풀 속에서 하얗게 늙었다

그래도 아들딸 낳고 양지바른 곳에

자리 하나 장만했으니 행복이란다

내겐 둘도 없는 행운인데

 

 

         *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우리,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