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망울
대롱대롱 여린 나뭇가지에 매달린 물방울은 물의 눈망울이다
나무는 세상을 보고 싶어 물방울로 눈망울 만들어 눈을 떴다
그 맑은 눈망울로 나를 보고 들여다보는 나도 눈망울이 되고 물방울이 된다
여린 바람에 눈망울이 달아날 것 같아 어쩌나 안쓰러움이 더해져간다
눈망울이 되고 물방울이 되어 나무는 우주를 본다
물방울 속에 눈망울이 있고 눈망울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눈망울이 있고 우주가 물방울로 비친다
이상하게도 가늘고 여린 가지만이 물방울로 눈망울을 만들 수 있다
바람도 없이 가는 비가 내리는 날은 우산도 싫고 모자도 싫다
아주 느리게 한발한발 숲길로 들어서다보면
어느새 나는 온몸에 푸르름이 돋아나는 나무가 되고 만다
♧ 수평선
아직도 바다를 보면
유년의 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
누렁이 데불고
보랏빛 순비기꽃으로 물들이고
머리칼 헤집는 바람은 보드랍다
활시위처럼 놓인 수평선
잡아 당겼다 놓곤 했다
화살처럼 쏜살같이 내 몸은 튕겨 나갔다
수평선 너머엔 뭐가 살지
물고기는 어디서 잠들고
물새 둥지는 어데 있지
누가 물결을 밀려오게 하고 바람은 얼굴이 왜 없지
수평선을 넘어가는 배 꼬리라도 붙잡고
수평선을 넘어갔으면 했다
넘어보았으면 했다
♧ 수평선
수평선에 섬이 보인다
바다 숨소리가 가랑가랑하다
수평선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둠에 갇혀가도 움직일 줄 모르는 새가 있다
불탄 하늘이 어둑발을 내밀고 있다
어두워져 가는 바닷가에 물새들이 시간도 잊은 채
소꿉놀이만 한다
아직도 까만 돌에 앉아 있는 새는 물소리에 취해서일까
돌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모래톱에 남긴 내 발자국도 이젠 눈을 감는다
빛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수평선으로
한 사내가 섬이 되어 흘러가고 있다
바다와 하늘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 두모악에서
-김영갑 갤러리
셔터 소리를 알아듣는 나무가 두모악에 산다
앞뒤로 뻥 뚫린 둥그런 화산석 안에
흙 사내가 고요 속에 젖어 있다
그 사내가 머무는 방은 바람도 둥글다
하늘도 둥글게 두모악에 내려앉는다
두모악엔 미로 같은 돌담길이 있다
돌담 위에서만 사는 흙으로 빚어진 자그만
사내들의 눈빛이
그 사내 눈빛처럼 허허롭다
돌담길을 거닐다 보면 정말로
누군가 부르는 듯한 셔터 소리에
바르르 떠는 나무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선 나무들도
귀를 열어놓고 몸을 열어놓고
토우들과 더불어 산다
그래서 빛도 구름도 오래 머물다 간다
♧ 詩에 대하여 - 문영종
詩쓰는 일 미친 짓이다
밤중에 홀로 깨어 새벽까지
쓰여지지 않는 詩 붙잡고
詩같지 않은 詩 붙잡고
詩를 캐어내는 일 부질없다
한평생 가슴에 詩를 담고 사는 이여
詩처럼 사는 일이 유쾌한가
詩는 밥이 되지 않으며
詩는 피가 되지 않으며
詩는 살이 되지 않으며
내 영혼을 비틀기만 하는 詩여
너에게서 달아나고 싶다
오늘 밤도 나는 너를 부둥켜안고
원수처럼
몹쓸 담배나 죽이며
* 문영종 시집 『물의 법문』 (도서출판 각, 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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