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귀포 동문로터리 닭내장탕 - 오승철
어느 도시에도 찾기 힘든 닭내장탕집
무김치 너덧 개면 접시가 넘치지만
그 식당 아줌마 볼도 김치처럼 물이 든다
닭장에 갇히거나 아파트에 갇히거나
닭의 길, 사람의 길, 그게 그걸 테지만
아리랑 아리랑 같은 구불구불 닭내장길
무김치와 닭내장탕, 아줌마와 사십 년 간판
궁합도 저리 맞아야 세상맛을 아는 걸까
주문을 넣기도 전에 보글대는 저 냄비
♧ 별천지 – 문순자
산이 깊어 그런가 별이 별을 부른다
자정을 훌쩍 넘긴 내설악 어느 절 마당
낮에 본 불사리탑이 별처럼 반짝인다
불상 하나도 없는 대웅전 들어서면
통유리창 안으로 언제 들어오셨나
비워둔 연꽃좌대에 가뿐히 앉아계신다
새벽 다섯 시면 하산을 한다는데
그렇게 부처님과 뜬눈으로 지샌 별들
벗어둔 등산화에도 독경소리 넘쳐났다
♧ 고사리 꺾는 날 - 조영자
일년에 스물두 번 제사 올리는 어머니
고사리가 없었다면 어떻게 지냈을까
열두 살 고사리손이 없었다면 어쨌을까
우리집 족보만 봐도 한 역사가 읽힌다
4·3이며 못 돌아온 배, 까마귀 모른 제사까지
가난한 어머니 눈썹에 밤마다 걸리던 별빛
고사리야 고사리야 꾸벅꾸벅 고사리야
이제는 사라진 마을 영남리 그 어디쯤
남루한 그 제상 위에 꾸벅꾸벅 고사리야
♧ 어머니의 가을 - 강현수
주인이 떠난 것을 과수원도 아나 보다
해마다 비 상품이 상품보다 늘어간다
이문이 없어도 좋다 출근하던 아버지
아버지 가위소리 어머니 가위소리
작년엔 또각또각 연애질 소리 같았다
그 소리 그리운 건지 가위 놓은 어머니
풍작은 아니어도 평작이 욕심인가
통장으로 처음 들어온 어머니의 성적표
가을은 늘 청맹과니 저 혼자 잘 익는다
♧발가락 군*의 소식을 듣다 - 김영순
서귀포 몽마르트르 솔동산길 오르다가
그저 비나 피할까 잠시 들른 이중섭 거처
일본서 당신의 부고가 손님처럼 와 있네요
수백여 통 남편의 편지,
그 편지 한 장 없어도
붓과 팔레트마저 미술관에 기증하고도
서귀포 피난살이가 그중 행복했다니요
돌아누우면 아이들 돌아누우면 당신
게들은 잠지를 잡고 아이들은 게를 잡고
오늘은 별 따러 가요
하늘 사다리 타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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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가는 아내를 발가락이 길다고 ‘발가락 군’이라 불렀다.
*정드리문학 『박수기정 관점』 (문학과 사람,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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