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문학의 향기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에서(1)

김창집 2023. 7. 20. 10:22

 

 

시인의 말

 

 

   시집 벌목장에서를 발간한 이후부터 최근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한 시들과 틈틈이 써서 서랍에 넣어둔 시들을 꺼내 한데 모았다.

 

   세상의 어느 시집에서도 완벽한 시를 읽을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런 시를 쓰려는 시인의 노력이 숨 쉬고 있을 뿐이었다.

 

 

                                                                                                                     2023년 유월

                                                                                                                              김병택

 

 

 

 

 

 

높이 떠 있으면서 속속들이

사람들의 그리움을 품은 뒤

늘 구름과 함께 돌아다니는

내 일상의 구석까지 스며든다

 

애써 곰곰이 과거를 되살리면

수평선을 넘으려던 내 꿈을

막은 이유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밤에는

고향 마을의 숲을 가로지르며

새들과 함께 부르던 옛 노래가

긴 음파에 실려 내 귀에 들려온다

 

사방이 거칠게, 크게 흔들려도

휘황하게 뜬 밤하늘에서는

어두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쉼 없이 하루 내내 별빛 부근

먼 곳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론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멀구슬나무의 희망

 

 

지금 막 도착한 집 마당에 서서

 

작은 잎들이 녹색 물결을 이루는

키가 큰 멀구슬나무를 바라본다

 

아침마다 집을 나서며 무엇인가를

결심하는 젊은이와 영락없이 닮았다

 

언제나 하늘을 향해 크게 손짓하는

꼭대기의 무질서한 줄기들도

시간과 함께 자란 것임은 확실하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감도는 날에도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웃고 있는

아담하고 화사한 몸짓의 부잣집

관목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비 내리는 날의 예고 없는 소음을

길고 긴 밤의 사막과 같은 고요를

좀처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보고 들은, 가문의 영욕에 대해

함부로 아는 체하는 일이 결코 없다

 

멍들면서, 때로 반짝이면서

역사는 갑과 을의 교집합 속에 있다는

명백한 사실조차 모르는 척하기 일쑤다

 

멀구슬나무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한 그루 키 큰 나무로만 남고자 한다

 

 

 

 

밤의 달맞이꽃

 

 

바람이 초가집 주위를 휘돌 때

몸을 움츠리던 달맞이꽃이

밤의 색깔을 가르며 꽃을 피웠다

 

하늘을 향해 일미터 높이로 서서

둥근 모양으로 쌓인 노란색의 외로움을

오랜 시간 곱씹는 게 자주 보였다

 

때론 세상을 인내하는 사람의 자세로

서늘한 밤의 파수꾼이 되기도 했지만

돌방아 속의 곡식보다 더 거친 삶을

좀처럼 잊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따뜻한 달빛 풍성하게 내리는 날

내가 웃는 얼굴로 슬며시 다가가면

지난 일 묻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일하는 시간이 모자라 겨우

밤이 되어서야 달을 보며 숨을 고르시던

정미년생 내 어머니를 닮은 꽃

누가 볼세라 다소곳이 피어 있는 꽃

 

 

 

 

녹나무 가지

 

 

4월이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올 때마다

고향마음 어귀에 서 있던 녹나무 가지는

크기와 모양의 바뀌었다

 

무고한 마음 사람들이 허망하게 쓰러졌을 때는

쏟아질 우박을 피해 이미 휘어진 가지를

더욱더 아래로, 아래로 늘어뜨렸다

 

거무스름한 모양으로 공중에 떠 있다가

사람과 사람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푸른 바람을 끊임없이 불어 넣었다

 

천둥 치는 날에도 주어진 사명에 따라

온종일 마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황금알,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