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들의 저울 - 김명숙
새들에겐 저울이 있다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은
발바닥 저울을 믿는다
무게를 재지 않아도
중심을 잡고
사뿐히 내려앉는 저 믿음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기면
날개가 추락한다는 걸 알기에
그들의 믿음엔 흔들림이 없다
세상의 부모는
사랑을 무게로 재지 않는다
자식의 일 앞에서는
윤리 도덕이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다
잠시 잠깐 휘청대다가
이내 중심을 잡고
나뭇가지에 내려앉는 새들처럼
헌신의 수레바퀴를 돌린다
♧ 순간의 꽃 - 나병춘
돌에도 꽃이 피랴?
종일 돌아 앉아
돌덩이인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햇살이 다가와
꼭 껴안아 주자
그늘에만 숨던 마음
화사하게 풀어놓는다
어디선가 흰나비 하나
위로하듯
어깨에 사뿐 앉는다
뜬금없이 나비가 떠나가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오붓한 순간
꽃자리 그 향기를
♧ 느티나무 - 나석중
괜찮다
몸 한구석에 귀뚜라미가 울어도
보이지도 않는 귀뚜라미는 왜 와서 우는지
요즈음 보이지도 않는 아들에게 섭섭한 생각이 들 때
나는 깜짝깜짝 뉘우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나에게 서운한 때 많았을 거라고
그러니 아들아 너는 걱정하지 마라
너도 일가를 이룬 나무, 몰아치는 비바람 잘 견디며
귀뚜라미처럼 괜히 와서 우는 일 없도록,
해가 짧아지면서 오른쪽 무릎에서 악기 소리가 나지만
몸이 알아서 현 한 줄 심심치 않게 튕겨주는 일
이제 뼈가 닳고 가슴이 밭는 일도
괜찮다.
♧ 아껴 접는 밤 - 김나비
명치에 접어둔 말들이 불쑥 울대를 타고 올라오듯
접은 날들이 자꾸만 펴지는 밤이면 나는 색종이를 접어요
대문 접기부터 시작해요
꾹꾹 눌러 접을 때마다
펼 수 없는 몸 가진 영혼을 생각해요
삐거덕 누군가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소리가 들려요
접은 것들은 모두 단단해요
펼쳤을 땐 깃털 같고 난로 같은 것들이
접고 나면 차갑게 뼈에 박히죠
빗물을 받아내다 접은 우산도 숨을 접은 당신의 몸도
마른 들깨 줄기 같은 손가락에 맥박 줄을 달고 검게 늘어진 밤
심박 그래프 파리하게 멈출 때
세상을 접고 돌이 된 숨
다르촉처럼 펄럭이는 오동나무 아래
접힌 숨을 심고 물을 줘요
언제부터 익혔을까요 숨 접는 법을
기억을 아껴 접다가
접히지 않는 시간은 어둠 속에 묻기로 해요
밤새 접은 파란 심장을 꿈속에 두고 오죠
펴고 접고 또 펼친 헐렁해진 종이로
새로운 대문을 접을 수 있을까요
삐거덕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요
접힌 색종이를 명목처럼 펼쳐 밤의 얼굴을 덮어요
---
*종이접기의 기본 접기 중 하나.
♧ 해오라비난초 – 홍해리
조카사위 간 날 너를 만났다
해오라비난초!
장례식장
신발마다 동서남북 제각각 갈 길을 향하고 있었다
영정 속에 갇혀 있는 저 생생한 사내
겨우 사십을 살고 가는 저 사내 가는 길이나 알까
한켠에서는 벌써 불콰한 얼굴들이 소주잔에 빠져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앞에는 검은 치마저고리들이 훌쩍이고 있었다
겨우 인생 초반을 살고 떠난 사내
조카사위! 하고 한 번 불러보지도 못한 사내
아홉살과 여섯살은 잔치집인 듯
문상객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천진과 난만이 어디까지이고 언제까지일까.
세상에, 세상에, 무엇이 그리 급해
울울창창 사십에 이승을 버리고 가나
부모 앞서 가는 것을 참척慘慽이라 하니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누군들 오가는 것을 알 수 있으랴만
누구나 오가는 걸 막을 수 있겠느냐만
그래도 그래도 사람이 하늘이라 했는데
청청벽벽靑靑碧碧 인생 마흔은 돌아설 수 없는 나이
가는 곳이 잔치마당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저 검은 꽃 한 송이 어쩌란 말이냐
울음에 북받쳐 헉헉대는 목쉰 꽃 한 송이
넋이 나간 저 꽃을 어쩌란 말인가.
부디, 좋은 곳으로 가거라
해오라비처럼 날아가거라!
* 월간 『우리詩』 2023년 7월호(통권 421호)에서
'문학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7) (0) | 2023.07.24 |
---|---|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2) (0) | 2023.07.23 |
정드리문학 '박수기정 관점'에서(3) (0) | 2023.07.21 |
김병택 시집 '서투른 곡예사'에서(1) (0) | 2023.07.20 |
남대희 시집 '어느 날 찾아온 풍경들의 기억'(6) (0) | 2023.07.19 |